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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을씨년스럽다와 호떡집에 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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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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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을씨년스럽다와 호떡집에 불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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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럽다, '을사늑약' 당시의 분위기를 날씨에 빗대어 이른 말

호떡집에 불나다, 조선에 살던 중국인들 갈팡질팡하던 모습에서 유래
일본의 만행에서 비롯된 슬픈 우리말이 있다. 대표적으로 ‘을씨년스럽다’와 ‘호떡집에 불났다’가 그것이다. 먼저 ‘을씨년스럽다’를 살펴보자.

1905년 11월 17일, 이날 중명전(을사늑약 현장) 안에는 한규설을 비롯하여 이하영, 민영기,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 대신들이 모여 일본 군인의 삼엄한 감시 속에 조약서 서명을 강요받고 있었다. 한규설은 회의 자체를 거부하여 다른 방에 감금되었고, 하루를 넘긴 18일 새벽 2시 마침내 ‘을사오적’이라 부르는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등이 조약문에 찬성하는 서명을 하고 만다. 8명 중 5명의 찬성으로 과반수였기 때문에 일본에 우리나라 외교권을 넘겨준 꼴이 되었다.
소식을 들은 고종은 본인의 결재 도장이 찍히지 않아서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일본은 콧방귀를 뀌면서 외국에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게 되었다고 알린다. 조약체결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백성들은 분노와 울분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의 장지연 사장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신문에 게재하여 억울함을 만방에 알렸고, 30일에는 민영환이 각국 공사와 전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한다. 뒤이어 하루 건너 한 사람씩 목숨을 끊으면서 마을 곳곳에 곡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웃음이 끊긴 대한제국은 궁궐뿐만 아니라 팔도 전체가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길에는 사람의 인적이 끊기고, 초겨울의 음산한 바람만 구슬픈 소리를 내며 적막감을 깨뜨렸다. 이날 이후 사람들은 검은 구름이 짙게 깔리고 스산한 바람까지 불어대면 을사늑약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하며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을 뱉었다. 이러한 ‘을사년스럽다’가 차츰 변하면서 오늘날의 ‘을씨년스럽다’로 굳어진 것이다.

“호떡집에 불났냐?”

때는 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 조선인과 중국인이 어울려 살았다. 서로 일본에 핍박받는 신세들이라 어려운 일을 도와가며 잘 지냈었는데, 매년 반복되는 가뭄으로 논의 물이 마르자 송화강의 물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인근의 중국 농민들이 물을 끌어들이면 콩밭을 망가뜨린다고 반대를 하면서 말다툼 끝에 멱살 잡는 시비가 붙었다.

다행히 중국 관리들과 조선인 대표가 신속히 수습을 하여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한편 일본은 호시탐탐 만주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던 차에 수로사건이 생기자 이 소식을 부풀려 조선의 한 신문에 ‘지금 만보산에서 조선인이 중국인에게 봉변을 당하며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라고 거짓 기사를 내 보낸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조선에 사는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성난 조선인들은 중국인을 보면 구타를 하거나 죽이기도 하고, 중국인이 경영하는 가게를 부수고 불을 놓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당시 음식점이나 호떡집을 많이 운영했는데, 한 호떡집에 조선인들이 몰려 와 불을 지르자 이 광경을 보고 놀란 중국인들이 갈팡질팡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이런 모습을 빗대어 우왕좌왕 할 때 ‘호떡집에 불났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만보산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조선에서 희생된 중국인들은 사망이 200여명, 부상이 3000여명이었고 재산을 팽개치고 조선을 떠난 사람도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참 미운 일본이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