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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입추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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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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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에 담긴 이야기] 입추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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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화창했던 주말에 저녁 뉴스를 틀면 “산 정상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등산객이 몰려 있습니다”라는 현장 기자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기자는 ‘입추의 여지가 없다’라는 관용구를 사용하여 사람이 많이 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어학사전에는 이 말을 ‘송곳을 찔러 넣을 만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들어차 있다’라고 뜻풀이 하고 있다. 그런데 뜻은 알겠지만 ‘입추’와 ‘여지’가 어떤 의미인지는 대개 잘 모른다.
‘입추’는 ‘송곳 같은 가느다란 꼬챙이를 박아 세운다’의 한자어 ‘立錐’이고, ‘여지’는 남겨진 땅 혹은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을 나타내는 한자어 ‘餘地’이다. 둘 다 한자어라 따로 떼어 보면 좀 생소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입추의 여지가 없다’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면 ‘가느다란 꼬챙이를 박아 세울만한 땅조차 없다’가 된다. 그럼 이 말의 유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지금부터 2000년 전 중국은 한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시킨 진시황의 진나라를 무찌르고 유방이 세운 나라다. 한나라의 7대왕은 ‘한무제’였는데 중국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한 왕으로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측근만을 비호하면서 백성들을 억압한 폭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왕이나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나 잘못된 정사에 대해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은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한무제 주변에는 늘 간신배만 들끓었다. 이러다 보니 나라 꼴은 말이 아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오죽하면 ‘동중서’라는 어진 선비가 관직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개탄하는 글을 남겼는데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소수의 간신배들이 나라의 땅을 독식하고 있어서 자작농은 소작농이 되고, 소작농은 노비가 되니 가난한 백성들은 이제 송곳을 꽂을 만한 땅조차 없구나. 간신배와 줄 닿은 시골 탐관오리들도 뺏고 뜯기에 광분해서 백성은 이미 마소와 같은 옷을 입고 개나 돼지의 먹이를 먹는 지경이 되었구나’라며 한무제를 원망했다.

동중서의 탄식에서 비롯된 ‘송곳 꽂을 만한 땅’이 한자로 ‘입추여지 立錐餘地’였던 것이다. 이후 이 구절은 중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도 전해져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동중서의 ‘입추의 여지가 없다’가 어원대로라면 ‘부쳐 먹을 땅이 없다’ 즉, ‘먹고 살 만한 방도가 없다’로 사용돼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빼곡히 사람이 들어 찬 모습의 표현으로 사용한다. 송곳이 사람으로 바뀌어 원래의 뜻과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어원이나 유래를 살피다보면 본래의 의미에서 변형된 것들은 이것 말고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값이 싸다’라는 말도 본래는 ‘값이 적당하다’는 의미였고, ‘비싸다’는 빚을 지기에 적당하다는 의미였다. ‘곁에 있다’에서의 곁도 본래 뜻은 겨드랑이를 말하던 것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입추의 여지를 예전의 뜻으로 사용한다면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말이란 당시의 상황에 따라 계속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지금 통용되는 말의 의미도 언젠가는 다른 의미로 사용 되어질 것이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