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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100만 촛불, 11월 혁명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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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의 일상향(日常向)] 100만 촛불, 11월 혁명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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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길마다 촛불이 몰려다녔다.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의 손을 가리지 않고 피어난 촛불은 광장에서 차도로, 차도에서 골목으로 길게 물결쳤다. 이지러진 달이 도심의 겨울 밤하늘을 데우는 동안, 촛불은 은하수처럼 흐르며 뜨겁게 땅을 달궜다. 촛불과 촛불 사이에서 발갛게 물든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고 함성을 질렀다. 노래는 국민들 위에서 전제 군주처럼 군림하려 들었던 꼭두각시 권력자를 풍자했고, 함성은 여전히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어리석은 권력자를 호통쳤다. 노래와 함성은 건물과 건물을 두드리며 만장을 나부꼈고, 광화문 지붕을 넘어 인왕산 벽을 치고 돌아왔다.

종로3가의 어느 작은 식당에서 일행과 이른 저녁을 먹었다. 시위로 토요일 장사를 망쳤다고 푸념하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건성으로 넘겨들으며, 오겹살에 막창을 구워 맥주와 소주를 조금 나누어 마셨다.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를 겨울밤 날씨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나라를 구하려면 잘 먹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갑자기 강추위가 몰아닥쳐도 끄떡없을 만큼 배를 채우고 편의점에서 물과 간식을 사서 가방에 챙긴 다음 인사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안국역을 거쳐 조계사를 지나 뒷골목을 통해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차가 사라진 도로마다 사람이 점령하고 있었다. 주한미국대사관과 KT광화문지사 사이에서 더 이상의 전진은 허락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몸과 몸으로 산과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노래와 함성으로 지축이 흔들렸다. 만나기로 한 후배에게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인터넷은 무용지물이었다. 통신사 기지국의 처리 용량은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을 대신해 사람들이 몰려갔다. 사람들은 파도처럼 너울대며 오갔다. 촛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별빛처럼 흘러 다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람의 행렬과 촛불의 흐름은 길고 느렸다. 이게 나라냐고, 썩어도 이렇게 썩을 수 있는 거냐고 분통을 터뜨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 사람들은 썩어 문드러진 나라의 살을 직접 도려내기 위해 광장으로 끝도 없이 모여들었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으로 이어져 있어요.” 이명준의 말처럼 사람들은 광장을 향해 밀실을 박차고 나와 있었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이 끝내 땅에서 만나지 못했던 광장은 4·19 혁명과 6·10 민주항쟁의 현장으로 시간을 건너 불려나와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시민이 되어 밀실에서 자행된 권력자의 부정과 부패를 심판하고 있었다. 광장에서, 끊어졌던 역사의 물줄기는 다시 합쳐지려 하고 있었다. 100만 시민의 힘으로 단절된 역사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힘들게 통화에 성공한 후배와 만나기 위해 평소 도보 20분 정도면 넉넉하게 닿을 수 있는 거리를 그보다 세배의 시간을 들여 걸은 후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했다. 도중에 대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일사불란하게 행진했고, 고등학생들도 교복에 가방을 맨 차림으로 대통령 퇴진을 소리치며 걸었다. 외국인들은 한가로이 거닐며 이국의 밤풍경을 향해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롯데백화점 앞에서 만난 후배의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은 저녁을 굶은 탓에 가방에서 꺼내 건넨 차가운 편의점 햄버거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어렵게 만난 반가움을 나누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명동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따뜻한 날씨 덕에 실외에 빼곡히 자리 잡은 사람들 틈에 섞여 후라이드 치킨에 생맥주를 마셨다. 우리말만큼이나 중국말이 자주 귀에 와 닿았다. 역사적인 날을 함께한 감회와 나라꼴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우리는 여러 번 잔을 부딪쳤다. 골목 끝에서 차들이 도로 위로 다시 고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하철이 끊긴 시간, 사람들은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광장을 향해 다시 발길을 옮겼다. 밤은 따뜻했고 휴일의 시간은 길게 남아 있었다. 급할 것은 없었다. 택시가 오지 않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밤의 여운을 느리게 즐기고 있었다. ‘11월 혁명’의 그날 밤, 100만 시민이 모였고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