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나는 가톨릭관동대학교의 산학협력단 교수였고 그는 학생이었다. 성실하고 착했는데 광고 디자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몇 푼 안 되는 장학금에도 밤을 새워 일했는데 프로들 못지 않았다. 그는 같은 꿈을 꾸는 기준, 성현, 연제, 혜은, 도환이와 함께 ‘늘솜’이라는 광고디자인 동아리를 만들어 나를 찾아왔다. 광고인이 되어 강릉을 떠나고 싶다고 했고 서울에서 온 내게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 현실을 감안해야 했다. 행복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니 성장을 위한 삶 그 자체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일을 하든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라고 했다.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이 인공지능의 몫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본질은 영원할 테니 인문과 경험으로 실력을 기르면 오히려 기회가 늘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겐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이야기였으리라. 떠들면서도 내내 미안했다. 그들과 ‘똥막’이라는 막걸리 집에서 노래를 듣고 경포대에 누워 별을 보았다. 작년에 들렀을 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똥막’은 불이 나서 문이 닫혀 있었다.
그 때 나는 방 한 칸을 얻어 서울을 오가며 살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은 3시간 남짓 걸렸다. 경기도 광주와 여주를 지나 원주와 둔내를 거쳐 평창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속사와 진부를 거쳐 대관령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virtual Insanity나 오아시스(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 같은 산뜻한 팝송이나 커피처럼 마음을 가라앉히는 쇼팽(Chopin)의 Nocturne, 사티(Erik Satie)의 Gymnopedies를 들으며 다녔다. 한잠 자고 나면 강릉이고 서울이었다. 김광석과 같은 해에 요절한 에바 캐시디(Eva Cassidy)가 마지막 순간 친구들에게 들려준 What a wonderful world도 자주 들은 노래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나의 강릉 유숙은 음악이 없었다면 한없이 처량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강릉의 봄과 여름, 하숙집 옥상에서 바라본 붉은 노을과 대관령 꼭대기에서 돌아가던 풍차도 지금 내 감수성의 조각들이다. 그러니 서울로 입성한 이도현에게 전한다. 心不在焉 視而不見(심부재언 시이불견)이라고 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서울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들을 가슴에 담아 의미를 새겨라.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 인생의 영약으로 다려지리라. 일과 돈은 인생의 그림자일 뿐임을 알게 되리라. 힘내라 이도현!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