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매주 수요일. 수요일이면 나는 ‘수’ 자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수제비 혹은 칼국수로 점심 또는 저녁을 즐겨 먹는 편이다.
삼월 셋째 수요일이었다. 집에서 13분 거리의 친구 사무실에 놀러갔다. 저녁이 되었다. 귀가하던 차에 초등학교 동창이 경영하는 칼국수집이 보여서 잠깐 들렸다. 바지락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오는데 친구가 뒤따르면서 배웅해줬다.
그때였다. 검푸른 밤하늘에 초승달이 시로 보였다. 나도 모르게,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라며 겅중겅중, 호들갑을 유난 떨었으리라.
독산성에서 진달래꽃을 보았다. 저수지 길가에는 개나리가 막 노랗게 물올랐다. 수청동 대우아파트 단지.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숲 사이로 언뜻 베이지 꽃송이가, 목련이 드러나는데 기뻐 “내 아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한 편의 좋은 시를 적어 카톡 문자로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시가 뭐냐고?
이미 앞에서 소개한 영남대 교수 이기철(李起哲, 1943~ ) 시인의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가 그것이다.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한 편의 시
“이 시를 읽고 나면 가슴속에서 맑은 시냇물 소리가 졸졸 흐르는 것 같습니다. 어찌나 마음이 맑아지고 따뜻해지는지 내 마음속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의 물결로 가득 넘쳐납니다. 한 편의 시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니!” (김옥림 <시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99쪽 참조)
처음 앞의 시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내게 들린 그림이 하나 있다. 고흐가 그린 <꽃핀 아몬드 나뭇가지(Almond Blossom)>가 그것이다. 동시에 음악이 하나 보였다. 그것은 가수 장범준이 부른 <꽃송이가>라는 노래였다. 어쨌든 그림과 노래를 같이 놓고 동시에 시를 따라서 들썩들썩 흥얼거리다 보면 기분이 꼭, 설렘이란 감정으로 온(ON) 들끓었다.
“그림은 고흐가 테오의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며 그 기쁨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면 고흐의 심성이 그대로 나타난다. 조카의 이름을 빈센트로 짓겠다고 하자 고흐는 처음에는 반대를 한다. 그러나 테오의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조카인 아기 빈센트를 위해 <꽃핀 아몬드 나뭇가지>를 그려서 보낸다. 테오는 축복의 마음으로 정성껏 그려낸 아몬드 나뭇가지 그림을 소중히 받는다. 갓 피어난 여린 아몬드 꽃망울이 연한 상아빛으로 탐스럽게 피어 있다. 꽃가지 하나, 꽃봉오리 하나 바람에 다칠까봐 삼촌인 고흐는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정성을 다해 예쁘게 그렸다. 남프랑스에서 아몬드 나무는 1월 말에서 2월 중순 사이에 꽃이 핀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꽃대를 올리는 아몬드 나뭇가지를 그리며 고흐는 갓 태어난 조카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표현했다.” (정지원 <내 영혼의 그림여행>, 69쪽 참조)
70년생 시인들에 해당되는 정지원 작가의 말처럼 극진한 조카 사랑이 담긴 명화라서 그런 걸까. 여타 고흐의 그림과는 달리 ‘꽃핀 아몬드 나뭇가지’라는 그림은 보면 볼수록 마음이 금방 맑아진다. 방긋 환해진다.
최상운 미술 여행 작가의 그림 설명은 이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고흐가 아를을 떠나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서 지내던 시절의 작품으로 (중략) 즐겨 사용한 색들이 잘 드러나는데, 바로 청회색과 올리브 그린이다. 흰 아몬드꽃이 청회색의 배경 그리고 올리브그린의 나뭇가지와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내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중략) 결국 조카는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 빈센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훗날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삼촌 빈센트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일화에서도 고흐를 향한 테오 부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은 아주 밝고 온화해서 조카의 출생을 축하하는 선물로 잘 어울린다.” (최상운 <우리가 사랑한 고흐>, 51쪽 참조)
어찌 보면 한국의 매화꽃과 묘하게도 닮은 것 같기도 한 아몬드 나무 말고도 고흐는 생전에 비슷한 색조 톤으로 ‘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그린 바 있는데 이 역시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른바 <꽃나무 시리즈>의 하나로 ‘분홍빛 과수원’, ‘흰 과수원’과 더불어 감상을 하노라면 무슨 인생의 봄날이 온 것만 같은 착각이 가슴에 온통 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쓸쓸하고 고통스럽고 침울한 분위기 풍의 고흐 그림과 전혀 다른 <꽃나무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꽃핀 아몬드 나뭇가지’는 단연 최고의 걸작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기철의 시 제목과 같이 고흐과 만난 사람들(동생 테오, 제수, 조카)은 매우 사랑스러운 존재이기에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그림이 고스란히 화풍에 담겨진 것이리라.
그렇다. ‘설렘’이란 사랑의 감정이 가슴에 없고서는 쓸 수 없는 한 편의 시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마지막 작품에 속하는 ‘꽃핀 아몬드 나뭇가지’를 마주보는 것처럼 시구 하나하나가 곱고 아름답고 온유해서 사랑스럽다. 자신 있게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의 품격이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무엇인지 아우르면서 일깨운다.
불화·고독·구원·회귀, 그리고 ‘희망’
고흐를 진정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열쇳말이 필요하다. 열쇳말은 ‘불화·고독·구원·회귀·희망’을 말함인데 이는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깊은 성찰과 따뜻한 시선일 것이다.
“서양화가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반 고흐, 그의 예술의 핵심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초기 네덜란드 시기부터 파리, 아를, 생레미, 그리고 마지막 오베르 시기까지 반 고흐의 창조 역정을 돌아보면, 이 시기별, 장소별 구분에 다섯 개 열쇳말을 얹을 수 있다. 불화, 고독, 희망, 구원, 회귀가 그것이다. 이것이 그의 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중략)
세상과의 불화와 고독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의 예술이 위대한 것은 고통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낙관의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희망을 향한 그의 염원은 강렬한 노란색으로 표출되었다. 그가 무척 좋아했던 친구 고갱과 예술적 이상을 나누며 지낸 <노란집>은 희망의 빛으로 충만하다. 바로 이 희망과 적극적인 생명의 의지로 노란 색이 많이 들어간 그의 그림은 지금도 세계의 미술애호가들을 열광시킨다. (이주헌 <이주헌의 ART CAFE-명화로 엿보는 세상 풍경>, 228~229쪽 참조)
고흐의 화풍은 시기적으로 1888년~1890년의 작품이 그 절정으로 보인다. ‘노란집’은 1888년 작품으로, ‘꽃이 핀 복숭아나무’와 같은 해에 그려졌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색깔 ‘노랑’은 ‘희망’을 뜻한다. 열쇳말 키워드인 셈이다.
명리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노랑은 땅(土)의 색깔이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흙’으로 읽힌다. 여기서 흙이란 아담과 이브를 빚은 창조주 손끝에 묻은 마음을 공허하나 닮았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고린도전서 15:49)라고 했던가.
아무튼 고흐가 그린 ‘노란집’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문이 열리는 집이지 싶다. ‘노란집’을 보면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정호승 시인의 ‘가난한 사람에게’가 그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 정호승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 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 밖에 걸어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얘기가 샛길로 빠졌다. 아무튼 불화와 고독은 오행에서 화(火)의 성질을 지닌 것이고, 구원과 회귀는 물(水)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노란집>이 희망으로 들리는 것은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하”여 보는 일상의 가난한 마음을 소유한 삶이 스며드는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가는 “하루”를 자족하며 살기에 비로소 이슬처럼 이동이 바닥에 가능해지는 것들이다.
‘노란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라.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고 마음이 가난한 농부들이다. 한국의 농부들은 노랗게 산수유와 개나리가 필 때가 오면 슬픔을 지우고 기쁨의 얼굴을 살짝 드러낼 줄 안다. 그런 낭만적인 여유가 있다.
이런 글이 “흙 묻은 손이 마음을 어루만지다”라는 부제가 붙은, 신간 <정원의 쓸모>(윌북, 2021년)에 슬몃 보인다. 다음이 그것이다.
“슬픔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경험이 다른 사람과 공유될 때도 마찬가지다. 가족에게 상실이 닥치면 서로 의지하지만, 그러면서도 각자가 상실감에 혼란스러워한다. 서로가 거친 감정에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감정이 폭발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피하려고도 한다. 반면 나무, 물, 돌, 하늘은 인간의 감정에 무감각하지만, 우리를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은 우리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전염되지 않는 특징 덕분에 상실로 인한 외로움을 달래주는 일종의 위안이 된다.” (수 스튜어트 스미스, 고정아 옮김 <정원의 쓸모>, 16~17쪽 참조)
구멍 난 가슴을 와락 껴안는 그림과 시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기.”
어머니를 3월 1일. 삼일절에 잃은 구멍 난 가슴의 친구에게 보내려고 했다가 그만 둔 문자 메시지 내용이다. 열 글자가 무슨 위안이 될까, 몇 날을 망설이다 임시저장 상태이다.
대신 친구에게 이기철의 시 한 편을 곧 보낼 것이다. 그림 ‘꽃핀 아몬드 나뭇가지’를 보면서 그 친구가 힘을 내주길 그저 바랄 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야, 장범준의 ‘꽃송이가’ 어때?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이조차도 ‘별’은 별이 아니런가. 시인의 말처럼 그런 이별은 숭고한 거니까. 힘을 내자. 너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지만 우리 주변을 온통 노란집으로 가꿔줄 개나리가 이윽고 지천일 테니 아몬드 나무를 닮은 벚꽃이 너를 반겨줄 테니 우린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아도 될 거야. 너를 위해 나는 시와 그림, 음악까지 준비했던 거야.
너와 나, 우리 또한 언젠가는 “잎 넓은 저녁으로 가”야만 하니까. 하늘을 닮은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만 하지 않을까. 나는 이제부터 말할 거야. 일종의 연습이지 뭐. 이렇게 말이야.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습니다.”
이 말을 너무 아끼지 말고 낭비하고 추구하고 사치까지 부리면서 좀 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마음이 ‘나’를 고흐처럼 만들어 줄 테니까. 그래 그거지. 테오가 좋으니까 그 아내도 심지어는 그 자식도 덩달아 사랑할 수 있는 거니까.
◆ 참고문헌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민음사, 2000.
김옥림 <시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미래북, 2019.
정지원 <내 영혼의 그림여행>, 한겨레출판, 2008.
최상운 <우리가 사랑한 고흐>, 샘터, 2012.
이주헌 <이주헌의 ART CAFE-명화로 엿보는 세상 풍경>, 미디어샘. 2016.
정호승 <수선화에게>, 비채, 2015.
수 스튜어트 스미스, 고정아 옮김 <정원의 쓸모>, 윌북, 2021.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