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살이던 1933년 (···) 아버님이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 이제 그 한 마리의 소가 천 마리 소가 되어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 산천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저의 이번 방문이 (···)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환경의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지난 1998년 6월 16일, 당시 84세였던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년 출생·2001년 별세)은 아버지가 소 판 돈을 갖고 18살에 가출한 빚을 이제야 갚는다면서 소떼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었다.
소는 큰 몸집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비폭력적이고 인내심이 강한 동물이다. 또한 근면과 희생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산은 이데올로기를 떠난 순수한 한민족 민초의 상징을 소에 부여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가 소떼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은 것은 남북한 동포, 그리고 세계를 향해 통일의 열망을 알리기 위한 마지막 절규였으며, 세기의 시위였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소르망(Guy Sorman)은 ‘소떼 방북’을 두고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격찬했다.
당시 아산은 ‘세기의 목동’이 되어 소떼를 이끌고 철책과 지뢰로 가득한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넘었다. 소떼 방북은 판문점이 남북을 갈라놓는 자리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줬다. 경협 추진의 ‘승부수’였던 이 세기적 이벤트는 현대의 업종적 특성과 함께 대북 사업의 선점 효과를 과시할 수 있었다.
방북한 아산 일행은 7박 8일 동안 소 500마리 인계, 경협 협의, 고향 방문 등의 일정을 보냈다. 김용순, 정운업(민경련 회장) 등과 경협에 대해 합의한 결과 양측은 △금강산 관광 개발 원칙에 관한 의정서 △금강산 관광 개발추진위원회 설립에 관한 합의서 △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승용차 및 화물자동차 조립 공장 건설·수출 △자동차 라디오 20만대 조립 △20만t 규모의 고선박 해체 설비 및 7만t 규모의 압연강재 생산 공장 건설 △제3국 건설 대상에 대한 공동 진출 검토·연구 △공업단지 조성 △통신사업 검토·연구 등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이때 합의한 내용은 그의 첫 방북 때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가 1983년 실리적 북한 접근을 주창한 이래 북한의 저임금·값싼 지하자원·낮은 물류비·관광 특수 등에 주목하고 냉전 해체의 상황을 자신의 사업 영역 확장에 활용하고자 한 오래된 구상이 15년 만에 비로소 실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합의 내용은 당시 현대그룹 전 계열사가 대북사업 계획서를 짤 정도로 철저하게 현대의 필요에서 출발했다. 이는 경협의 업종 특성을 반영한다. 즉 아산은 자본의 생산력 저하라는 위기 앞에서 냉전해체라는 시대적 조건을 자신의 기업에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한 철저한 실리 주의자였다.
아산이 소떼 방북에서 돌아오기 전날 1998년 6월 22일 속초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정 1척이 그물에 걸려 예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일 후 7월 12일에는 동해시 해변가에서 무장간첩 시체 1구가 발견되었다. 정부는 “북한의 사과가 있어야 현대의 2차 소 지원과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와중에 8월 31일에는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해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계속 악재가 터지자 아산은 1998년 10월27일, 다시 소 501마리와 현대 승용차 20대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다. 그리고 북측에 경협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핵심 고리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을 강하게 요구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불거지는 경협에 대한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김정일의 사업 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하자 북측으로부터 김정일이 지방 출장 중이라는, 사실상 면담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냥 돌아가겠다”는 아산의 뚝심에 마침내 10월30일 밤 아산이 머물던 백화원초대소를 방문한 김정일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 면담을 통해 아산은 김정일로부터 금강산 일대 8개 지구의 독점개발권 및 사업권을 확실하게 보장받았다. 아산은 자신의 사후에도 현대그룹이 통일 한반도 개발의 반석을 마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대북 투자 독점권을 확고히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998년 11월 18일 마침내 금강산 관광선의 첫 출항이 이뤄졌다. 분단 반세기 만에 철벽과도 같던 분계선을 오가는, ‘꿈 같은’ 일이 실현된 것이다.
2023년 6월 16일은 아산이 소떼 방북을 한 지 정확히 25년이 되는 날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한국 사회에서 아산만큼 복잡한 평가를 받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는 ‘개발독재’ 시대의 대표적 재벌이었지만 오히려 진보 진영에게서 인정받고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의 마지막 사업인 남북경제협력사업(경협) 때문이다. 보수 진영은 그가 정력적으로 추진한 경협을 돈키호테, 노망이라고 폄하하거나, 그의 경협을 이해하는 측조차 말년의 감상적 수구초심 정도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소떼 방북으로 상징되는 아산의 경협 의지와 추진력을 단순히 ‘순수한 열정’ 또는 ‘고향 사랑’으로 이해하면 정작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된다는 점이다.
윤만준 전 현대아산 사장은 아산은 “근본적으로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결코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분단 장벽을 넘어 시장과 자원의 보고인 동북아 대륙에서 그리고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취약하게 하는 분단을 넘어 자신이 줄곧 주창해온 대로 자유기업이 활개를 펼 수 있는 경영 환경을 조성하고 장애 요인을 돌파하는 데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상식적인 기업인이었다. 이처럼 상식적 기업인이 한국 사회에서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은, 경영 외적 장애 요인을 타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한국 기업의 ‘기업가정신’이 그 정도에 머물러 있고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냉전의식에 압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1974년부터 1988년까지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를 역임하며 아산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박정웅 메이텍인터내셔널 대표는 아산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이같이 설명했다.
“정 회장은 나라의 법은 원칙적으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민족적 숙원인 북통일이라는 진로에 결정적 장애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측근에 비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데올로기든 실정법이든 어디까지나 한 시대의 사상가나 정치 세력이 만들어낸 것이고 이해집단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시대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서 변화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역사가 이러한 것들에 의해 방해받기엔 너무나 절실하고 지고하며 영속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시비에 대한 평가를 최종적으로 후대와 역사에 맡기고 그의 신념을 그 특유의 행동력으로 실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산은 통일에 기여하는 방법으로 경협을 추진했다. 한국의 대기업 총수 가운데 경협-북방경제권을 연동시킨 거대한 구상을 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끈질기게 일로매진한 사람은 아산 뿐이었다. 기업인으로서 아산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일 수 있지만 이 점은 분명히 주목받아야 한다.
원대한 구상을 실현하고자 시작한 ‘소떼 방북’이었지만, 25년이 흐른 재계는 현재 한국사회에는 그때의 정신이 사라진지 오래라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더욱 악화된 정치적 관계로 인해 경헙과 같은 모든 단어는 금기어가 되다시피하고 있다.
<참고: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