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약 제품이 실린 열차가 폭발했지만, 이에 대한 책임은 회사에 없었다. 열차에 화약을 상차한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법적 책임은 철도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암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임원들을 향해 "일 처리를 그런 식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장사는 주판을 놓기 전에 상도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기업의 사명은 국가 발전을 위한 기여이므로 법적 책임 유무와 상관없이 국가와 국민에 해가 되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사고 이후 막대한 피해 금액 보상으로 인해 당시 경제계에서는 "이제 한국화약은 끝났다", 재기는 어렵다"는 등의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한국화약은 화약인 특유의 기업 문화를 중심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 국내외를 강타했던 건설 붐과 전사적인 경영 혁신을 바탕으로 회사는 1978~1979년 2년 연속 10대 그룹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달성했으며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에서 393위에 오르며 세계적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시련 뒤에 더 강해진다는 의미의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한국화약도 큰 위기를 겪은 뒤에 더 강한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아들 김승연, 제2의 창업 이루다
장남 김승연 회장이 본격 경영에 뛰어든 것도 이때다. 당시 현암은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미국 유학 중이던 장남을 불러들여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김 회장은 태평양건설 해외수주 담당 이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사장에 임명된 뒤 1979년 중동에서 1억 달러 규모의 대형 주택공사 수주에 성공하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1981년 현암 김종희 회장의 별세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 자리에 오른 그는 인수를 통해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현암의 경영 방식을 자신의 회사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시작은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현 한화솔루션 케미칼·첨단소재 부문) 인수였다. 미국 화약 업체인 다우케미칼은 1981년 제2차 석유파동 때문에 글로벌 석유화학 산업이 휘청이자 한국화약과 한국다우케미칼의 매각을 검토 중이었다. 문제는 두 기업의 적자가 총 500억원에 달했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화약까지 휘청일 수 있는 위험한 인수였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와 다르게 김 회장은 인수 1년 만에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려놨고 한국화약의 석유화학 사업 기반을 다져나갔다. 1986년에는 명성그룹 5개사(정아레저타운·정아관광·정아건설·정아컨트리클럽·명성)를 인수해 레저산업에 진출했다. 또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을 인수해 유통업으로 확장을 꾀했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화약은 1981년 당시 15개였던 계열사가 1991년 27개사로 늘었고, 매출도 1조600억원에서 3조8000억원으로 성장한다.
1993년에는 사명을 지금의 한화로 바꿨다. 사명에는 화약산업의 전통을 이어받아 민족 저력을 재창조하겠다는 화, 석유화학과 에너지 산업으로 우리 경제의 골격을 튼튼하게 할 화, 여러 가지 산업의 조화와 균형으로 더욱 여유로운 사회를 향한 화, 새로운 각오를 바탕으로 번영과 영광의 세계를 향한 화 등 4가지 뜻이 담겨 있다.
김정희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h132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