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용 장애를 질병으로 공인하는 이른바 '게임 중독 질병 코드 도입'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국산 콘텐츠의 해외 수출액 중 3분의 2를 책임지는 사업의 근간을 해칠 수 있다며 업계는 물론 정부, 학계, 정계에서도 질병 코드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게임산업협회(게산협)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과 협력,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게임이용장애 국제 세미나'를 열었다.
한덕현 중앙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조문석 한성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등 국내 학계인은 물론 앤드류 쉬빌스키(Andrew Przybylski) 옥스퍼드 대학교 인간행동기술학 교수, 마띠 부오레(Matti Vuorre) 틸뷔르흐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등 해외 학계인들이 현장에 함께 했다.
축사를 맡은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K-게임의 세계적 위상에도 게임 이용 장애에 관한 그릇된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일부 국민들의 부정적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세계적 전문가들이 모인 세미나가 게임 인식 개선에 큰 기여를 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또 게임이 국내 콘텐츠 수출 중 약 70%를 책임지고 있다고 밝혔다. 콘진원이 올 초 발표한 '2023년 상반기 콘텐츠 산업 동향'에 따르면 게임은 국산 콘텐츠 수출액 총 53억8600만달러(약 7조4300억원) 중 64.2%의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게임 콘텐츠 수출액이 반년 만에 5조원 가까이 발생한 것으로, 같은 기간 국내 콘텐츠 매출에서 게임이 차지한 비중이 13.6%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수출 효자'로 불려도 손색 없는 수치다.
게임 중독 질병 코드 논란은 2019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세계보건기구(WHO)는 질병 분류 체계 ICD(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11에 게임 이용 장애를 새로이 질병 코드로 등록했다.
국내에선 통계청이 ICD-11 등 국제표준분류를 기준으로 매 5년마다 국내 표준을 개정하는 일을 맡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게임 이용 장애 관련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오는 2025년 관련 내용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관해 보건복지부나 종교, 학부모 관련 민간 단체 등은 질병 코드 도입을 찬성하고 있으나 게임 산업계와 게이머들, 문체부 등 유관 부처를 중심으로 '무분별한 게임 혐오',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과잉 의료'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정계에서도 게임 중독 질병화에 대해선 대체로 반대하는 모양새다. 게임이용자협회가 올 4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개한 정당 질의서에 따르면 관련 질의에 집권 여당 국민의힘은 "게임 중독 질병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주요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인터넷 중독에 대한 전반적 논의 없이 게임을 특정해 코드를 부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답변했다.
제20대 국회부터 '대한민국게임포럼' 대표의원으로 활동해온 조승래 민주당 의원은 앞서 언급한 '게임이용장애 국제 세미나'와 연계해 이달 4일 국회에서 관련 세미나를 열었다. 이번 22대 국회에선 대한민국게임포럼을 '국회 게임정책포럼'으로 확대, 게임 인식 개선과 현안 해결을 위해 힘을 모은다는 방침이다.
해외 학계는 대체로 '게임 이용 장애'를 겪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이것의 원인이나 해결 방안 등에 대한 고민, 단순한 현상을 넘어 다른 정신적 질환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가 등의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신중론을 보이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게임이용장애 국제 세미나에서 앤드루 쉬빌스키 교수는 "게임 이용 장애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연구 방향성, 치료 방안 등에 대해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며 "WHO 결정에 따라 질병 코드를 무조건적으로 각 국가의 표준으로 등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마띠 부오레 교수는 "WHO는 2019년 당시 게임 이용 장애를 질병으로 등록한 것에 대해 어떠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했는지 학계에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며 "게임 이용 장애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성화돼야 하며 한국과 같이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사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미시간 대학교 연구진은 올 초 '비디오 게임 중독률 탐구를 위한 새로운 연구'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진을 이끈 푸닛 만찬다(Puneet Manchanda) 교수는 "스팀 이용자 중 최소 14.6%, 최대 18.3%의 이용자가 중독적 징후를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면서도 "게임 자체나 특정 장르가 중독성을 갖고 설계됐다는 주장은 입증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개개인의 특징과 환경, 욕구 등이 중독 여부를 결정짓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선 살인 사건 등 범죄 사건이 벌어질 때, 가해자 혹은 용의자가 게임 이용 장애를 가졌던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수차례 제기돼 갑론을박을 일으켰다. 올 6월 초 모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 '과학수사대 스모킹 건'에서도 만삭의 아내를 살해한 남편의 살해 동기에 관해 '하루에 길게는 10시간 가까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겼던 것'을 제시해 논란이 됐다.
쉬빌스키 교수는 이에 관한 질의에 "서구권 기준으로 15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이 많았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연구 결과가 발표되며 '게임은 폭력, 범죄의 원인이 아니다'라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며 "일례로 네덜란드에서 진행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말에 신작 게임이 출시된 경우, 오히려 다른 때에 비해 범죄율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고 답했다.
이원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wony92k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