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연약해 보이는 작품들은 타인을 향한 사랑이다
빈 존재로써 집은 다른 사람과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곳
그에게 있어 집은 사람이 쉬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이며
보듬어주는 공간이자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꿈이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아예 ‘자신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신만의 방이 필요하다”며 자신만의 공간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은 ‘19호실(To Room Nineteen)’에서 가정에서 만족감을 찾지 못하고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호텔방이라는 도피처를 찾아 겨우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안도하는 존스 부인(Mrs. Jones)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렇듯 우리는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해지는 것이다.
동선(銅線)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다. 서로 틈 없이 너무도 붙어 있어서 갑갑할 수도 있지만 이 집들은 그렇지 않다. 모두 비어있는 것이다. 모준석의 조각은 돌과 나무를 깎아 형태를 만들거나 재료를 형틀에 넣어 모양을 만드는 주조의 방법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각 기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드로잉 후 흙으로 드로잉한 전체 형태를 구축하고 동선으로 용접 후 흙은 비워진다. 그의 작업은 공간을 채워 넣는 조각이 아닌 속을 비워내는 작업이며 빈 공간 속의 드로잉이다. 이 비워냄을 작가는 ‘자기 비움(kenosis)’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케노시스는 성경 빌립보서 2장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는 구절에서 유래된 말로, 그리스도가 신의 존재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비워냄을 의미하는 용어다. 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워 전적으로 신의 의지를 수용한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을 비워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비워 타인을 받아들이는 의미를 비워진 그의 조각으로 표현한다.
우리들 하나하나는 집 하나하나다. 그 집은 우리가 차지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비워내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그러한 공간이다. 그래서 그 집은 빈 공간이다. 나만을 위한 공간으로 걸어 잠그기 위한 문은 없으되, 밖을 내다보고 안을 들여다보는 창문은 있다. 고딕 성당의 창문은 밖의 빛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그 빛을 변화시킴으로써 투명성과 부유성의 효과를 달성했다. 속세의 세상과 단절된 듯한 신비한 세계를 보여주어 좀 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절대적인 종교적 환상의 공간으로 보는 이들을 이끈 것이다. 그러나 모준석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이 세상을 향한 창이자 힘들고 고된 삶을 밝고 아름답게 보는 긍정의 마음이다.
다른 이들과의 아름다운 공존의 세계를 작가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으로 설명한다. 레비나스에게는 나와 너(동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대립되고 분리 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관계 속에 항상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레비나스의 초월 또는 형이상학이란 바로,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흔적 삼아 나타나는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하며, 이 관계란 내가 나에게 전념하는 세계를 떠나, 나와 전혀 다른 자에게로 가서 그를 위해 나를 건네주는 일이라고 한다. 레비나스에게 “사랑은 타인을 향하며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그로 향한다. 연약함은 여기서 그 어떤 속성에 대해 열등한 정도가 아니며 나와 타자에게서 공통된 결의에 대해 상대적인 결핍이 아니다.” 모준석의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이는 작품들은 타인을 향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나는 나만의 공간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로 꽉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며, 빈 존재로써 타인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음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모준석은 “건물을 사람에 빗대어 나타낸 것은 건물이 지어지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모습도 점점 아름답게 만들어져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서로 다른 건물처럼 서로의 모습과 생각이 다름을 발견한다. 하지만 다름이 독특함이 되어 그 속에 이야기가 담기고, 다양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을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마을을 만들어나간다.”고 표현한다. 그에게 집은 사람이 쉬고 머무를 수 있으며, 사는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공간이자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꿈이다. 이 꿈은 나에게 집중하는 나의 자아실현의 꿈이라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꿈이다. 우리의 인생이 나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모준석의 집들은 여러 채가 함께 보여 골목을 이루고 마을을 이룬다. 사이좋게 모여 있는 이 집들은 또한 함께 길을 간다. 풍선이 되어 하늘을 날아가기도 하고, 트럭에 타고 소풍을 가기도 하며, 손수레에 실려 배에 실려 나아간다. 꿈꾸는 것이 모두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비워냈기에 자기만의 공간과 방을 꿈꾸기보다 함께 나누는 정감을 택했기에 이들이 가는 길은 하나의 길일 수밖에 없다.
공존의 길은 외롭지 않은 길이며, 내 앞의 상황이 어둡고 암담할 지라도 보이는 상황에 좌절할 필요가 없는 길이다. 전시장 흰 벽에 외롭게 부유하는 듯한 사람의 이미지에 그림자가 비추어지면 그는 지붕 위에 앉아 별을 보거나, 집의 벽에 기대어 있다. 힘든 상황에서도 바라볼 희망이 있으며, 등을 기댈 곳이 있다. 비워낸다는 것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공존으로 내 삶을 희망으로 채우는 것이다.
영국의 조각가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는 건물과 건물 내부, 사물들의 빈 공간을 캐스팅해서 우리가 공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식을 뒤엎으며 일상성을 비틀어 우리의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텅 빈 무(無)의 공간을 석고, 브론즈, 합성수지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꽉 찬 덩어리로 전환시키는 화이트리드의 작업은 조각에 대한 관념을 전복하는 것이며, 존재와 부재에 대한 물음이고,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을 은유하고 있다.
화이트리드가 빈 공간을 채워 존재와 부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과 달리 모준석은 채워져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공간을 비워냄으로써 나와 타인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긍정한다. 모준석의 작품 속에서 빛나는 것은 비워져있는 집들을 색색깔로 밝히는 고운 빛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니다. 사이좋게 너와 나를 보듬어 함께 나아가는 정겨운 희망이며 밝은 꿈인 것이다.
■ 작가 모준석은 누구?
모준석은 국민대 및 동대학원에서 입체미술을 전공했으며, 아트광주, 아시아 탑갤러리 호텔 아트페어(홍콩), ASYAAF 및 한국미술관, 예술의전당, 충무아트홀, 소마미술관, 호치민대학교 미술관 등 다수의 국내외 전시 및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대상), 이연호미술상(평론가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조각, 설치 작품을 외부 조형 공공미술작품으로 확장하려는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 필자 전혜정은 누구?
큐레이터. 미술비평가. 예술학과 미술비평을 공부했다. 순수미술은 물론, 사진, 디자인, 만화, 공예 등 시각예술 전반의 다양한 전시와 비평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