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났네!"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크게 오르내린 때는 아마도 임오군란(1882) 직후일 것이다. 당시 사회는 민씨 척족들의 전횡으로, 삼정(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근본을 이루는 전정, 군정, 환정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 극도로 문란해져 무지렁이 백성만 죽어나가고 있었다. 급기야 무위영 소속의 구식군인(신식군인은 별기군)들이 13개월치 월급을 모래 섞인 쌀로 받게 되자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성난 군인들은 경멸의 대상이던 관료들을 찾아내어 즉살시키고 이런 가운데 민비는 변장을 하여 충주로 도피를 한다.
군란의 소요 속에 군인들은 제거해야 할 관료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칠문'을 하게 되었다. 칠문은 본래 백성의 원성을 사거나 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사헌부에서 '야다시(夜茶時)'를 열어 죄를 논한 후에 해당 관료의 집에 찾아가 물증을 들이대어 인정하게 하고 죄목을 흰 널판에 써서 대문 위에 붙인 연 후 그 대문에 옻칠(漆門)을 한 다음 가시덤불로 막아 출입을 봉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칠문을 결정하는 야다시 회의는 말뜻 그대로 사헌부 관리들이 야간에 비상 소집되어 은밀히 논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혹여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하여 차를 마시면서 신중을 기하는 회의였는데 임오군란 때는 야다시를 무시하고 폭동 군인들이 칠문만 행했던 것이다.
여하튼 군란 당시 군인들에 의해 칠문 당한 집을 보면서 오가는 사람들은 "내 저리 될 줄 알았지. 이제 저 집 야단났군!"하면서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칠문당한 집에 대고 '야단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야단'은 칠문을 결정하는 '야다시' 회의의 '야다'에서 나온 말로, "야단났다"는 곧 "칠문 당했다"와 같은 의미이고, 오늘날에는 와서는 '매우 곤란한 일을 당할 때' 사용되고 있다.
'야단'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야단법석'이란 말이 있다. 야단법석의 사전적 의미는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을 말한다. 하지만 '야단법석'은 불교 용어 중의 하나로 한자로는 '野壇法席'이며 '야외에서 크게 행하는 설법'을 지칭한다고 한다. 예부터 부처님 탄신일인 초파일 같은 기념일에 법당이 아닌 야외 공터에 임시로 높은 단을 올리고 부처님의 말씀(설법)을 전하는 자리 즉 '야단법석'이 만들어 지면, 주변으로 성스러운 탱화나 괘불도 장막에 걸리고 비구니의 수려한 춤도 곁들이게 되어 볼거리가 풍성했다한다.
설법도 듣고 볼거리도 즐기려니 당연히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이러한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모습에서 '야단법석'이 크게 변형된 의미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야단법석이 다소 부정적으로 쓰이고, '야단치다' 혹은 '야단맞다'도 같은 맥락으로 스님이 설법하는데 시끄럽게 떠들면 호통을 쳐서 장내를 조용하게 한 데서 유래되었다 하는데 조금은 혼란스럽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