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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럽다'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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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럽다'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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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이재경 기자]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이나 비가 내릴 듯 우중충한 것이 ‘을씨년스럽다."
스산한 분위기를 묘사할 때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이 말의 유래는 구한말 우리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긴 1905년(을사년) 을사늑약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1905년 을사년(乙巳年)에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온 나라가 침통하고 어수선하며 슬픔에 잠겨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조약일인 그해 11월 17일 이후부터 사람들은 몹시 쓸쓸하고,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고 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발음이 ‘을씨년스럽다’로 변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을사년스럽다’라는 단어가 그동안 문헌에 보여야 했는데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부에서 ‘을사년’에서 ‘을씨년스럽다’가 나왔다는 설이 의심을 받게 되던 중 이해조의 ‘빈상셜’(1908년)이란 신소설에 ‘을사년시럽다’는 단어가 쓰였음이 알려졌습니다(조항범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소설이 씌어진 1908년은 을사늑약 3년 뒤이기 때문에 ‘을사년스럽다’의 어원을 ‘을사년’으로 볼 근거가 충분하다는 주장입니다.

최근 경북대 강민구 교수가 조선 후기 송남(松南)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의 ‘송남잡지(松南雜識)’를 완역했습니다. 조재삼은 조선 후기의 재야 선비로 평생을 모은 자료로 백과사전인 ‘송남잡지(松南雜識)’를 저술한 인물입니다. 송남잡지는 우주의 기원부터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은어, 속어의 유래 등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실려 있습니다. “세상에서 을사년(乙巳年)은 흉하다고 두려워하는 까닭에 지금 생전 낙이 없는 것을 ‘을씨년스럽다’라고 한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1905년) 전에 이미 을씨년스럽다란 말이 쓰이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강민구 경북대 교수).

위 두 민간어원설로 미루어 보아,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을사년’인 것은 맞는데 1905년 을사년부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이 을사년 어느 해엔가 큰일을 당한 뒤부터 스산한 날을 표현할 때 을사년스럽다고 해왔는데, 후대에 와서 1905년 기막힌 을사늑약을 당한 뒤 ‘을사년’ 유래설이 더 그럴싸하게 널리 퍼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을씨년스럽다는 ‘보기에 살림이 매우 가난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을씨년스럽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처럼 쓰입니다. ‘을씨년스럽다’에 포함된 ‘가난하다’는 의미의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북한에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거나 매우 지긋지긋한 데가 있다’는 뜻으로 쓰여 같은 단어인데도 남북한에서 뜻이 조금 다르게 쓰입니다. 북한에서는 ‘을씨년스럽게 스산하다’란 의미로는 ‘을스산하다’가 쓰입니다. ‘을씨년하다’와 ‘스산하다’가 혼합된 말입니다.


이재경 기자 bubmu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