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천내리 고인돌에 새겨진 고대의 그림
2018.04.17 11:25
화장사 안에는 1, 2, 3호의 지석묘가 있다. 4호는 화장사 뒷담에 끼어 있고, 좁은 뒷담 길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5, 6, 7, 8호가 화원 교도소 담벼락 아래에 자리한다. 극락보전 옆에 위치한 1호 지석묘 위에는 다산을 기원하거나 별자리를 표시한 성혈(星穴)이 뚜렷하다. 요사채 앞의 2호는 능소화 줄기가 바위를 타고 올라 있고, 쌍둥이처럼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양쪽을 호위하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화장사의 가장 안쪽 칠성각 옆에 커다란 3호 지석묘가 자리한다. 8기 중 가장 크고 대구에서도 가장 큰 것 중 하나라고 한다. 이 거석의 오른쪽 10도 정도 기울어진 경사면에 동심원 암각화가 있다. 모두 6개가 있다. 얕게 새겨진 3
'다산 기원' 대구 천내리 고인돌 덮개 성혈
2018.04.16 11:28
대구 천내리 화장사 경내의 절 집 중 가장 큰 규모인 극락보전 옆 고인돌 상부에는 다산을 기원하거나 별자리를 표시한 성혈(性穴 또는 星穴) 자국이 뚜렷하게 보인다. “성혈은 고인돌 덮개돌에서 종종 발견된다. 한 바위에 서너 개에서부터 수십 개까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민속에서 알 구멍, 알 바위, 알 뫼 등으로 불리는 성혈은 일반적으로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와 별자리 등을 상징한다. 성혈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유럽,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 인류 공통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선사시대 사람, 특히 여성들이 덮개돌보다 더 날카로운 손도끼 등을 이용해 홈을
대구 천내리 동심원 암각화
2018.04.12 10:33
"달성군 화원읍에 김보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불경뿐 아니라 한문과 지리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독실한 불자였으나 마을 주변에 절이 없어 안타깝게 여기던 중 부처님께 좋은 절터를 가르쳐 달라고 날마다 불공을 드렸지만, 3년 동안 불공을 드려도 허사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돌 7개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그 중 제일 끝에 있는 돌 주위에 절을 지으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김처사가 그 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꿈 속에 말해준 7개의 바위가 모두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그 7개의 바위 중 6개는 모두 거의 붙어 있고 남쪽 끝에 있는 돌만 홀로 떨어졌다. 그 돌은 다른 돌보다 유난히 커 보였으며 주변의
대구 천내리 8기의 고인돌
2018.04.11 11:49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515-1번지, 화장사(華藏寺) 경내와 바로 인근의 대구교도소 담장 밖에는 모두 8기의 고인돌이 있다. 화장사 경내에 3기가 있고 담장 밖 바깥에 4기가 있다. 이는 바로 교도소 철조망 울타리 옆이다. 그리고 나머지 1기는 화장사의 담벼락에 결쳐져 있다. 이 중 경내의 칠성각 바로 옆에 있는 고인돌은 높이가 3m, 길이가 5m정도로서 대구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화장사는 화원읍내의 중심지역에 자리한 사찰로서 1925년 보원거사(속명·김영옥)라는 분이 칠성바위가 있는 곳에 절을 지어라는 현몽을 꾸고 사찰을 지은 곳이라고 한다. 화장(華藏)이란 연화장(蓮華藏)과 같은 말로서 연꽃세계라는 말이 되겠다. 그리 연혁
대구 천내리 청동기시대 지석묘
2018.04.10 13:54
대구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이다.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더 많았으나 지금은 8기만 줄을 지어 남아 있다. 그 중 3기는 화장사(華藏寺) 경내에 있고, 1기는 화장사 담에 걸쳐 있으며, 4기는 화장사 바깥의 화원교도소 바깥에 있다. 상석 모양은 일정하지 않고 상석의 축 방향은 북동쪽과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지석(支石)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의 다른 지석묘보다 크기가 큰 편에 속한다. 2006년 4월 20일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3호에 지정되었다.
대구 진천동 암각화 선돌
2018.04.09 09:37
진천동 암각화 선돌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진천동에 위치하는데, 진천동 고인돌(支石墓)Ⅰ군에 해당된다. 도로구간에 포함되어 1997년 경북대박물관이 발굴조사하였다.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진천 천변의 충적대지상에 입지한다. 선돌(立石)은 조사 당시에는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로 추정하였으나 조사 과정에서 기단석들이 노출되어 선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재질은 화강암(花崗岩)이고, 크기는 210×150×110㎝이다. 선돌 하부에 축조된 기단은 평면형태가 장방형으로, 전체적인 규모는 길이 2000∼2500㎝, 너비 1000∼1250㎝ 정도이다. 기단부는 흘러내린 석재로 보아 본래 7∼8단 정도 쌓아 구지표면에서의
고인돌과 함께 자주 볼 수 있는 선돌
2018.04.05 07:30
입석은 큰 돌을 세워 놓은 것으로 선돌이라고도 하며, 고인돌이 있는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진천동에서 선돌을 세운 주위로 석축을 네모난 형태로 둘러 쌓아 놓았고, 선돌 앞에서 제사의식을 지낸 것으로 짐작된다. 선돌 주위에는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있다. 주변지역은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으나, 유적 보존을 위해 선돌 지역을 발굴조사하여 정비하였다. 고인돌과 선돌의 관계 및 서로의 기능적 성격을 통해 고대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카드뉴스] 대한항공, 델타항공과 맺은 '조인트벤처'란?
2018.04.04 10:14
대구 진천동의 거석문화 선돌
2018.04.04 07:00
대구 진천동 선돌은 경북대 박물관이 1997년 발굴조사한 청동기시대 유물로서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진천 천변의 충적대지에 위치한다. 조사 당시에는 고인돌의 덮개돌(上石)로 추정됐으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기단석들이 노출되어 선돌로 밝혀졌다. 이 선돌의 역사·고고학적 중요성이 입증되어 1998년 12월 23일에 사적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선돌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크기는 길이 150㎝, 너비 110㎝, 높이 210㎝이다. 선돌 하부에 축조된 기단은 평면형태가 긴네모모양(長方形)이며 전체적인 규모는 길이 20∼25m, 너비 10∼12.5m 정도이다. 기단부는 흘러내린 석재로 보아 본래 7∼8단 정도 쌓아 옛 지표면
너럭바위 ‘상주리 석각’은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풀 열쇠
2018.04.03 11:11
금산의 서남쪽인 상주면 양아리 두모마을에서 금산 부소바위로 오르는 길목에는 남해지방의 고대 역사를 밝히는 데 귀중한 유적이 하나 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로 산길을 헤치고 들어가면 길 왼편에 보호철책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평평한 너럭바위가 하나 나온다. ‘상주리 석각’이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이다. 가로 7m 세로 4m 정도 되는 너럭바위는 두모마을이 자리잡은 두모포를 향해 기어내려가는 듯이 보인다. 거북이 오른쪽 궁둥이 부근에 그림 모양 문자 혹은 문자 모양 그림이 사방 가로 1m, 세로 50㎝ 크기로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고대글씨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혹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
‘서불이 남긴 '알쏭달쏭' 남해 양아리 암각화
2018.04.02 10:57
천하를 통일한 중국 진시황이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시종 서불을 불렀다. "서불아 너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줄 터이니 불로초를 구해 오라" 서불은 산 넘고 물 건너 남해 금산까지 찾아왔지만 불로초는 구하지 못했다. 늙지 않게 해 주는 풀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한동안 사냥만 즐기다가 금산을 떠나면서 바위 위에 글을 새기고 갔다. 이런 이야기를 간직한 바위가 남해에 있다. 남해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상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두모마을 표지석과 함께 두모포로 가는 길이 나온다. 두모마을 표지석에서 상주쪽으로 500여m 가로수길 왼쪽에 금산 부소암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20분 정도 산을 오르
'서불과차(徐市過此)'로 불리는 남해 양하리 석각화
2018.03.29 10:36
양하리 암각화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양하리(상주리와 경계)에 있는 선사시대의 석각화(石刻畵)이다. 세로 50㎝, 가로 100㎝로 경상남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錦山) 부소암(扶蘇巖)으로 오르는 길목의 가로 7m, 세로 4m의 평평한 암석 위에 새긴 석각화는 ‘서불과차(徐市過此)’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삼신산(三神山)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시종인 서불(徐市)이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금산을 찾아 한동안 수렵 등으로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이 화상문자(畵像文字)를 새겼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석각에 대
[카드뉴스] 식목일에 나무심는 이유? '나무 한 그루의 효과'
2018.03.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