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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2)]초보 홀로여행, 오판 또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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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2)]초보 홀로여행, 오판 또 오판

6월7일 수하물 지연소동, 6월8일 헬싱키의 청초한 첫인상

귀국 때 잠시 파리 시내에 나갈 요량으로 파리 경유 티켓을 끊은 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여행사를 통해 예약한 단기 여행만 다녔기에 비행기표 구입부터 초보 여행자 티를 팍팍 낸 것이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 도착시간이 6월7일 오후 2시25분, 거기서 핀란드 헬싱키행 비행기는 1시간 뒤인 오후 3시35분 출발했다. 갈아타는 데 한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이런 표를 팔겠지 하고 막연한 생각에 온라인으로 표를 구입한 것이 사단이었다. 기상 상황 등의 이유로 비행기가 지연 도착할 수도 있고, 보딩타임은 출발시간 수십분 전인 데다가 다시 공항 짐 검사를 거쳐야한다는 것 등을 간과한 것이다. 게다가 바로 이동만 하면 될 줄 알았더니 에어프랑스 체크인 데스크에서는 달랑 파리행 보딩패스만 줬다. 헬싱키행 보딩패스를 다시 발급받을 시간까지 필요한 것이다. 전자항공권을 자세히 보니 파리발 헬싱키행은 핀에어가 운용한다고 돼있다.

비행하는 동안 이동하는 지역의 전자지도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데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려고 한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각 지역의 상공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표 가격과 도착시간만 고려하느라 한참 우회, 비행시간이 길어진다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좀 더 돈을 주고서라도 직항표를 구입해야했나 슬슬 후회가 밀려오던 참이었다.

비행기가 하강하는 동안 프랑스인 승무원들에게 물어보니, 일단 내려서 지상직원에게 문의하란다. 마음이 마구 급해져서 빨리 내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니 랜딩하자마자 먼저 하선할 수 있는 퍼스트클래스 자리에 가서 대기할 수 있도록 해줬다.

▲ 헬싱키 시내는 생각보다 작아서 걸어서 웬만한 주요관광지를 다 돌아볼 수 있다
◇파리 드골공항을 미친 듯 주파

기내에 가지고 탄 짐만도 못 돼도 15㎏이 넘을 터, 이 짐들까지 잔뜩 지고 무조건 뛰었다. 비행기를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내리자마자 있다는 에어프랑스 데스크까지가 끝도 없이 멀게 느껴졌다. 유럽인들의 특징은 한국인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여유다. 지상직원은 컴퓨터에서 뭘 한참 눌러보더니 무조건 2D(2터미널 D게이트)로 가란다. 터미널 지도를 보니 테제베 역을 중심으로 방사형태 공항의 거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해야하는 것이다. 중간중간 가면서 공항직원의 잘못된 안내로 또다른 에어프랑스 데스크에 문의하느라 시간이 더 지체됐다.

무빙워크에서 잠깐씩 숨을 고르며 물어물어 간신히 핀에어 데스크에서 보딩패스를 받아 가까스로 비행기까지 이동하는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급한 상황이 되니 없던 힘도 나는구나. 평소의 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이었다.

땀범벅이된 얼굴을 손수건을 찾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겨우 안도감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안은 벌써 핀란드였다. 핀란드인 고유의 특성이 있는 얼굴들로 그득했다. 아시아 쪽에 가까워서인지 핀족은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다소 평평하고 광대뼈가 나온 듯하다. KBS ‘미녀들의 수다’로 유명해진 살미넨 따루를 연상하면 된다. 스튜어디스들도 체구는 큰 편이지만, 우리가 동양적 체형이라고 하는 특징들을 지닌 몸매가 많다. 아마도 북유럽국가들 중 정서적으로도 우리와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 스웨덴 등 강대국 사이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온 시수(Sisu) 정신이 있다. 번역하자면 ‘은근과 끈기’ 같은 거란다.

◇내 짐은 어디에? 전화위복이라 해야하나

파리 공항에는 죽죽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막상 이륙하자 눈이 부시도록 날씨가 화창하다. 기분도 고양됐다. 게다가 작은 모니터로나마 출발시에는 기장석에서 보이는 풍경, 뜨고난 후에는 지면을 항공촬영해서 보여주는 것도 분위기 고조에 한 몫 했다. 두어시간이 지나 헬싱키 반타공항에 다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늘을 향해 쭉쭉 곧게 뻗은 공항 주변의 자작나무숲이다. 핀란드 특산물로 알려진 자일리톨 껌의 원재료가 된다는 그 나무들이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섰는지 밀림이 연상될 정도였다.

오후 7시15분께 도착. 착륙하자마자 머릿속 한구석을 지배했던 우려가 현실이 됐다. 내가 이렇게 갈아타기가 촉박했으니 인천공항에서 위탁 운송시킨 내 짐은 또 어땠으랴. 불안감을 누르고 수하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내 캐리어는 보이지 않는다. 인천공항 체크인 데스크에서는 분명 짐은 헬싱키에서 찾으면 된다고 했다.

직원에게 문의하니 아마도 밤 11시에 파리에서 오는 다른 비행기편으로 올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확인이 안 된단다. 수하물 분실이 내게 현실이 되는 건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가지고 있는 영어실력을 총동원해 3개월간 뉴시스 통신사에 여행기를 연재하기로 하고 모든 취재 사전연락을 취해놨는데, 이걸 못하게 되면 큰일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고는 시키는대로 서류를 작성했다. 여직원은 일단 숙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도착하는대로 짐을 배달해주겠다면서 연락이 없을 경우에 문의해야할 전화번호와 온라인으로 현재 짐 상황을 체크할 수 있는 조회번호를 알려준다. 키트를 하나 건네주는데 열어보니 급하게나마 입을 수 있는 티셔츠 한 장과 치약칫솔, 1회용 면도기와 면도크림, 데오드란트(체취가 강한 서양인들에게는 필수품이지만 동양인들에게는 불필요), 세탁세제 등이 들어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핀에어 버스에 올라탔는데 짐 걱정에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오후 8시가 훨씬 넘은 시간인 데도 대낮처럼 훤하다. 백야 현상이다. 스마트폰에 날씨 어플을 받아놨는데 요즘 헬싱키의 일출시간은 새벽 4시 이전, 일몰은 밤 10시40분 이후라고 한다.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을 자각시키며 내다본 창밖, 운동장에서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조명의 보조 없이도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맡은 핀란드의 공기는 한없이 청량했다. 공기가 맑다는 것이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곳곳이 녹지대다.

숙소는 헬싱키 중앙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에로타얀푸이스토 호스텔. 2005년 핀란드 최고의 호스텔로 꼽힐 만큼 친절한 곳(도착해보니 트립 어드바이저 사이트에서 주는 ‘우수 보증’ 우승자라는 팻말도 걸려있다)이지만, 시내 건물 3층에 있는 데다가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홈페이지에 명시돼있다. 커다란 캐리어를 어떻게 끌고 올라갈까 걱정했는데 가져다준다니 다행 아니냐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대충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6명이 함께 쓰는 기숙사형 방인 데다가 2층 침대는 사람 키만큼 높아 오르내리는 일도 만만치 않다. 코를 고는 이까지 있다. 한국과 핀란드의 6시간 시차 때문인지, 여독 때문인지 깊게 잠이 들지 않는다. 근육통도 대단하다. 노트북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 검색을 해보니 수하물 지연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사연도 다양했다. 도착 현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는 비용을 지원해주는데 시일이 지체될수록 지원액수가 올라가더라는 얘기부터, 아예 현장에서 50 내지 100 달러를 요구해 받아와야 한다는 글도 보인다.

짐을 찾지 못하면 이대로 돌아가야하는 건지…. 북극탐사라도 가는 듯한 어마어마한 짐더미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장기간의 여행을 해야한다. 게다가 뉴시스에는 거의 매일 실시간으로 원고를 보내기로 했기에 부담감도 만만치 않다. 3개월에 걸쳐 600여통의 e-메일을 주고 받으며 예약한 숙소와 취재 요청, 협조 요청들을 일일이 취소해야할 일도 까마득하다. 체력에도 그다지 자신감이 없었던지라 과연 이번 여행계획을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색 끝에 수하물 추적을 할 수 있는 웹사이트(http://www.worldtracer.aero)를 발견했다. 공항에서는 알려주지 않은 사이트 주소다. 내 짐 번호를 넣어 검색하니 다행히 짐을 확인했으며 핀에어가 배달해줄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떠있다. 새벽에 깨어보니 밤새 짐을 가져다놓고 갔다고 한다.

◇천국에 왔나, 아름다운 자연

가벼운 기분으로 아침을 사먹기 위해 마켓광장(Kauppatori)을 향해 나섰다. 방향을 잘못 잡았나보다. 지도상으로 아래쪽에 있는 디자인 박물관(Design museo)이 떡 하니 나타난다. 헬싱키 시내는 생각보다 작아서 걸어서 웬만한 주요관광지를 다 돌아볼 수 있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데 우리나라처럼 커다란 표지판이나 상호광고판이 없어 길찾기가 만만치 않다. 거리명을 건물 귀퉁이에 작게 적어놓았을 뿐이다. 게다가 핀란드어 단어들은 길이도 긴 데다가 낯선 언어라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핀란드인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다 잘하지만, 인구밀도가 엄청 낮아서 좀 한적한 거리로 들어서면 길을 물어볼 사람 찾기도 어렵다. 꽤 방향감각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도 난관에 봉착한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 해가 떠있는 곳이 동쪽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기준도 잊고 있었다. 잘생긴 중년신사에게 길을 물어보니 바다가 나오는 쪽으로 가서 올라가다 보면 나온다고 친절한 미소로 가르쳐준다. 특히 공원을 가로질러 가면 좋을 거라고 덧붙인다. 해변에 위치한 도시답게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날아다니는 소리가 요란하다.

도시 한 귀퉁이의 공원지대에 들어선 순간 우습게도 난 ‘천국에 와있는거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화 ‘러블리 본즈’의 CG 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 비현실적이었다. 티없이 맑고 선명한 푸른 하늘,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상쾌한 공기, 갓 깎은 잔디의 싱그러운 풀냄새,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그득한 공간에서 오감이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헬싱키의 위도가 높아서인지 태양의 위치는 낮고,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오염되지 않은 대기를 통해 쏟아지는 태양빛은 더 밝고, 강렬했다. 그러고보니 불편하던 비염도 사라졌다! 온도가 낮아지면 콧물을 흘리곤 해서 손수건을 많이 챙겨왔는데, 꽤 차가운 느낌이 드는 공기인데도 사용할 일이 없다.

마켓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하비스 아만다(Havis Amanda) 인어상 분수다. 헬싱키가 ‘발트해의 아가씨’라는 별명을 가지게된 이유다. 이들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헬싱키 대성당이다. 헬싱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으로, 내가 더 감탄한 것은 모스크 모양의 둥근 지붕 위로 펼쳐진 하늘이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물같이 푸른 하늘 바탕에 깃털 구름들. 화가가 흰색물감으로 붓질을 해놓은 듯한 형태. 아주 고요하고 정적인 하늘이다. 아무리 바라다 봐도 질리지 않았다.

내가 북유럽을 선택해 온 것이 단순히 관광안내서에 나오는 유명관광지들을 점 찍듯 확인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기 위해서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안배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영화 ‘카모메 식당’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카하빌라 수오미(핀란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반나절 정도만 돌아다닌 후 숙소로 일찍 돌아왔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