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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4)] 헬싱키 암석교회, 나는 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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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4)] 헬싱키 암석교회, 나는 울었네


6월 9,10일 두 번이나 방문한 템펠리아우키오에서 핀란드어 예배를…

헬싱키 관광 첫날 화창했던 것과 달리 이튿날인 9일, 오후부터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빗방울이 쏟아졌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방수 재킷을 꺼내 모자까지 뒤집어썼다. 초여름이라지만 아침에는 11도, 낮에도 14~17도 정도. 아무래도 해안가에 있는 도시인지라 날씨변화가 심한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춥게 느껴졌다. 스마트폰에 세계날씨 앱을 받아서 갔는데, 헬싱키 날씨 예보는 종종 바뀌었다.

카페 알토에서의 브런치 후 ‘암석교회’라 불리는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 Kirkko; Kirkko는 교회라는 뜻)로 향했다. 헬싱키에 와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천연 바위언덕을 굴처럼 파내서 만들었다는데 뒤쪽에서 보면 풀과 꽃, 나무들이 마구 자라있는, 그저 작은 암석산처럼 보인다. 초록색 둥근 지붕이 없다면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다. 이 언덕을 올라갈 수 있는 길도 나있는데, 여기까지 올라와보는 관광객은 몇 명 안 되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라 더 그런지 입구 쪽에는 헬싱키에 온 관광객들은 다 여기에 모여 있는 것 같다. 한산한 이 도시에서 이렇게 사람들로 바글대는 건 처음 봤다. 교회로 향하는 대로 양쪽에는 기념품숍들이 많았는데, 워낙 방문객들이 많으니 이미 상혼에 찌들대로 찌든 듯 싸구려 물건들에 비싼 가격을 매겨 놨다.

입구에는 관광객 공개시간이 게시돼있는데 비공개 시간에는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는 듯 했다. (유럽인들은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 일생에 3번 교회에 간다더니) 마침 밴에서 흰 공단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내리자 관광객들의 스트로보가 터진다. 이곳에서 결혼하려면 무수히 낯선 외국인들에게 사진 찍히는 건 각오해야할 것 같다. 신부는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미혼모이거나 재혼일 수도 있고, 많은 유럽인들이 그러하듯 아이를 낳고 동거하다가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일 수도 있겠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조용히 해달라는 안내판이다. 한국어도 보인다. 예배실로 들어가는 쪽에는 세계 각국 언어로 된 ‘안부 문구’를 새긴 종이카드가 있어 가져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한국어 칸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M 바실레아 명의로 된 글귀들이 내 마음을 울렸다. “어려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끝까지 견디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항상 기쁨으로 변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고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당신의 길이 어둡고 험할 지라도 영광으로 거두실 것입니다” 와 같은 내용. 결국 예수를 믿으라는 메시지지만 그 가운데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 이 종이에 인쇄된 인터넷주소(www.Kanaan.org)로 들어가 태극기를 클릭하니 기독교마리아자매회 한국사이트로 접속된다. ‘복음주의 초교파 개신교 여성독신공동체·독일1947년 창립·마더 바실레아 슐링크‘라고 안내돼있다. 종이에 적힌 M 바실레아는 그녀를 지칭하고, 문구들은 그녀의 저서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암석교회’라 불리는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 Kirkko)

◇쏟아져 내리는 눈물의 이유는

예배당은 강건한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안온했다. 뒷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날이 흐려지면서 바람이 몰아치고 비까지 쏟아지자 ‘폭풍의 언덕’이라도 만난양 격정적이 된 이유도 있을 터이다. 낯선 곳에 홀로 있다는 것, 낯선 풍경, 낯선 얼굴들 속에서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 견디는 것이 두려웠는 지도 몰랐다. 여행이 신나고 흥미로운 만큼 낯선 길들을 익숙지 않은 언어로 물어물어 찾아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80일이 넘는 여행을 이어가야했기에 당장의 관광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기차표를 예약하는 등 다음 일정도 놓치지 않도록 신경써야한다. 게다가 그냥 관광도 아니고 취재도 해야한다. 취재 약속과 원고 마감도 꼭 지켜야하니 신경 곤두설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헬싱키 중앙역 관광안내소 직원의 무성의한 태도에도 서러움이 밀려들 정도로 이국땅에서의 외로움도 컸다. 건축물의 웅장한 성스러움에 압도됐는지도 몰랐다.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종교에서는 건축물에 그리 공을 들이는지도 모른다.) 복합적이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나는 정말 생에 지쳐있었다. ‘내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 두고 이번 여행을 떠나온 것도, 사실은 삶에서 느꼈던 실망과 괴로움을 벗어나고픈 마음, 그리고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몰랐다.

나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드리는 어머니가 생각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고뇌하는 나에게 종교를 권했다. 유난히 에고가 강한 나는 절대자에 기대는 것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해왔다. 한국교회의 부조리함과 비리가 특히 싫었다. 어떤 종교든 종교의 본질은 위로 아닐까. 종교가 성하는 걸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녹록한 것이 아니었나보다. 그것이 신이든, 아니면 거대한 숙명이든 그저 거기에 자신을 위탁할 수 있다면 생을 받아들이기가 좀 더 쉬울 터였다.

◇암석교회에서 핀란드어 예배를 보다

내 눈물의 의미를 다시한번 확인해보고 싶어 다음날일 10일 일요일을 맞아 다시 템펠리아우키오를 찾았다. 기념품을 파는 곳에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듣고 싶다고 하니 예배시간에 들어볼 수 있다며 이날 오전 10시에 예배가 있다고 알려줬다. 음향효과가 좋아 콘서트도 종종 열린다고 하는데, 바위 벽을 따라 울려퍼지는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꼭 들어보고 싶었다. 어떤 여행안내서에는 오후 2시에 영어 예배가 있다고 나와있는데, 이는 몇년 전 없어진 것 같다고 한다.

이날 본래 핀란드 디자인의 본산지라 불리는 피스카스 마을에 방문하겠다고 홍보실에 알려놓은 상태였다. 김명한 aA디자인뮤지엄 관장의 강연에서 알게된 곳이다. 그가 이곳을 다녀온 후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하니, 꼭 가보고 싶어서 무리하게 일정에 껴넣었는데 불가피하게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교회는 개신교의 일파인 루터파 교회다. 목사는 초록색 사제복을 입고 예배를 올렸다. 색다른 건 천주교에서처럼 목사가 포도주와 성체를 나눠주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도, 찬송가도 핀란드어로 진행되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멘’ 뿐이다. 그래도 최면효과라도 있는 듯 편안해진다. 파이프오르간 반주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참석한 신도의 수는 한 30여명 될까. 듣던대로 흰머리의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한 시간이 넘는 예배시간 동안 내부를 천천히 음미해볼 수 있었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밖에서 보이는 둥근 지붕의 안쪽은 금빛 금속재질로 원을 그리듯 둥글게 만들어놓고, 천장 주변은 방사형으로 200여개 창살을 설치해 유리창을 내놓았다. 마치 태양에서 태양빛이 퍼져나오는 모양새인데, 창으로는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와 더욱 멋졌다. 벽은 바윗덩어리들을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어떤 방법으로 고정시켜 안전도를 확보했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 한 중년여인이 신자들에게 헌금 주머니를 돌렸다. 마침 주머니에 한국돈 1000원짜리가 있어 이를 넣으려하니 받지 않겠단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우리는 그렇게 큰돈을 받지 않는다”고 내 자리로 와 해명하며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청한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설교단 뒤쪽의 공간으로 가니 신도가 차와 빵을 나눠먹으며 이른바 ‘교제시간’을 갖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EEVA). 한국돈 1000원은 1 달러도 되지 않는 돈이라고 하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0이 줄줄이 있기에 굉장히 큰돈인줄 알고, 뭔가 착각하고 내려는 건줄 알았다”며 배꼽을 잡고 한참을 웃는다. 보통 얼마씩 헌금하느냐고 물으니 5내지 10 유로(1 유로는 1500원 정도)를 낸다고 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적은 돈을 내는 것 같았다. 헌금주머니 속으로 동전들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십일조를 강요하는 한국 교회가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왜 꼭 힘들게 바위산을 쪼아내 교회를 만들었냐고 물어보니 형제 건축가(수오말라이넨 형제)가 낸 아이디어일 뿐이라며 외부 벽에 나이지리아 비아프라에서 아사하는 아프리칸들을 기억하자는 스프레이 낙서가 있어 ‘비아프라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알려준다. “이 교회 지을 돈으로 비아프라를 돕자는 의도로 핀란드 젊은이들이 한 낙서”라고 한다.

작별인사를 고하고 교회를 나서는데 햇볕이 짱짱하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진다. 아무래도 내 기분은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