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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5)]두레소리 英감독, 헬싱키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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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리 북유럽80일 (5)]두레소리 英감독, 헬싱키대에

▲ 김 교수와 김 교수가 소개해준 영국인 박사과정 학생 앤드루 로기(Andrew Logie).

6월11일, 헬싱키대 김정영 교수·앤드루 로기 인터뷰
핀란드 헬싱키 도착 5일째인 6월11일, 오늘은 중요한 취재가 있다. 헬싱키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고 있는 김정영 교수를 오전 9시에 만나기로 한 날이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가는데 핀란드인들도 확실히 ‘월요병’이 있나보다. 금요일이었던 관광 첫 날의 느낌과는 딴판이다. 하나같이 서둘러들 걸어가는데 표정들도 밝지만은 않다. 게다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이들까지 종종 있다. 해안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담배연기가 확 내 얼굴에 끼친다.

본격적으로 관광에 나선지 4일째인데 대체 아직도 핀란드어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단어의 길이도 너무 길고 표지판도 따로 없다. 건물 모퉁이에 작게 적힌 도로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일이 다가가서 지도와 대조해보는 수밖에 없다. 음식물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도 제품들에 핀란드어만 적혀있어 하나하나 물어보고 사야한다. 아침에 오렌지주스가 마시고 싶어 편의점인 키오스크에 들러 오렌지 음료가 뭔지 주변 핀란드인에게 물어봤더니 레모네이드라고 한다. 막상 뚜껑을 열어 마셔보니 환타 같은 청량음료다. 아마 까막눈으로 사는 것이 이런 기분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여행의 피로감을 더한다.

김 교수의 연구실은 헬싱키 성당 바로 옆이라고 했는데, 바쁜 아침이어서인지 길을 물어도 하나같이 건성건성 대답해 건물들 사이를 좀 헤매야했다. 김 교수와 김 교수가 소개해준 영국인 박사과정 학생 앤드루 로기(Andrew Logie)와 인터뷰를 잘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는데 캐논 디지털카메라 배터리가 금세 나가버린다. 구입한지 10년 가까이 된 제품인데 방심하고 한국에서 그냥 들고 온 것이 문제다. 여분의 배터리는 필수인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 불찰이었다.

◇여행 초반 직면한 문제들, 어쩌나…

호스텔 데스크에 물어보니 우편박물관 옆에 대형 카메라 매장이 있다고 한다. 알려준 대로 RAJALA라고 씌여진 빌딩 1층에 가니 여직원이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정말 러키하다”면서 맞는 배터리를 가져다준다. 49 유로로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 아니다. 사소한 일에 기분이 좋아진다.

근데 또 금방 기분이 처질 일이 생긴다. 소코스 백화점 지하 S마켓에서 장을 본 후 현금지급기를 테스트해보았다. 여기서는 ATM기를 오또(OTTO)라고 한다. 씨티카드는 국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출국 전 신용카드와 국제현금카드를 만들어가지고 왔다. 여기저기에 있는 오또에 카드를 들이밀어봐도 두 카드 모두 기계가 읽지를 못하는 것이다! 분명 카드를 만들 때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고, 씨티는 미국계 은행이기에 해외에서 사용이 더 용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막막해진다.
스웨덴 열차표를 웹사이트에서 구입할 때 등 한국에서 발행되는 신용카드가 먹히지 않는 일도 있다고 한다. 다른 국가에서도 씨티카드로 현금 인출이 안 되면 어쩌나, 정말 막막하다. 특히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화장실도 동전을 내고 들어가야 하기에 현금은 필수다.

핀란드에서 사용할 유로를 60만원 정도, 노르웨이 크로네를 50만원 정도 환전해왔다.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는 외진 북극권을 거칠 예정이고, 그곳에서는 버스 등에서 현금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숫자, 특히 돈 계산에 약한 편이고 한국에서는 거의 신용카드만 사용했기 때문에 현금 사용이 용이하지가 않다. 그래도 현금을 쓰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고 해서 헬싱키에 온 후 현금만 써왔는데 신용카드로 대체해야한다. 게다가 덴마크에서는 해외발행 카드는 5%정도씩 수수료를 부과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이미 덴마크의 한 호스텔을 온라인 예약할 때도 겪은 일이다. 이 때문에 아예 자체적으로 외국에서 발급된 카드를 받지 않는 곳도 꽤 많다고 하는데 닥칠 일을 생각하니 더욱 힘이 빠진다. 시스템 문제인 듯하니 씨티은행에 항의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온라인 문의를 해보려 해도 무선 인터넷도 불안정하고 공인인증서도 없어 홈페이지 접속이 쉽지 않아 확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정 안 되면 현지 은행에 임시계좌를 만들어 한국에서 송금받는 방법 등을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머리가 아파왔다.

무리를 해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다. 애초 독자들에게 실시간으로 함께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다는 의도로 연재를 시작하다보니 매일 써야하는 원고량이 만만치 않다. 값싼 공용숙소를 사용하다보니 조용한 시간대인 새벽에 깨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야하고, 혹시나 있을 노트북과 부대장치, 휴대용 하드디스크, 휴대폰과 카메라, 리더기, 충전기, 현금, 카드, 여권 등등의 분실이나 도난을 예방하기 위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 매번 정리를 하고 짐을 싸야한다.

에로타얀푸시토 호스텔은 외벽공사 중이라 창문 밖을 비계와 장막으로 막아놓아 숙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하는 나로서는 영 마뜩치 않다. 헬싱키 날씨는 걷잡을 수 없어서 햇볕이 나다가도 흐려져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슬슬 몸살감기 기운까지 온다. 바닷바람을 많이 맞아서인지 미열도 난다. 이럴 땐 핀란드식 사우나가 제격일 것 같다. 거의 가구당 사우나를 갖추고 있어 대중적으로 사우나를 즐길 수 있는 곳은 몇 곳 되지 않는 것 같다. 수영복과 타월, 세면도구 등을 주섬주섬 싸들고 우르욘카투 대중수영장(Yrjönkadun uimahalli)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영화 ‘카모메식당’ 마지막 부분에 여주인공 사치에가 핀란드인들로 부터 박수를 받는 부분에 나오는 곳으로, 벌거벗고 수영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녀 사용시간이 구분돼있는데 마침 월요일은 여성 전용인 날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철문이 굳게 닫혀 잠겨있다. 5월28일부터 8월2일까지 폐장한다는 안내문만 한 장 떡 붙어있다. 왜 닫는지 이유도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숙소로 너털너털 돌아 왔다.

◇한국어·핀란드어 유사성 주장, 람스테트

그래도 오늘 애초 계획했던 인터뷰를 완수한 것을 생각하니 기운이 난다. 이럴 때는 목적성을 잃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여기에 ‘연재’를 위해 왔고, 그것이 잘 진행됐으니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핀란드 인물 중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v John Ramstedt 1873~1950)가 아닌가 한다. 그는 우랄 알타이어를 한 계통으로 보며 한국어와 핀란드어가 유사하다고 주장했지만, 이 이론은 금세 사그라졌다. 하지만 한국어를 국제 사회에 알린 그의 공로는 크다. 람스테드는 1919~1929년 일본주재 초대 핀란드 공사를 지냈는데 1924년 본격적으로 한국말 연구를 하게 됐다고 한다. 한국말 어원학을 개척한 공로로 김 교수에 앞서 헬싱키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고 고송무 교수의 주선으로 1982년 한국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 언어학자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Gustav John Ramstedt 1873~1950)rk 1939년 쓴 ‘코리안 그래머(한국 문법)'.

그의 흔적이 알고 싶어 주한 핀란드 대사관에 문의했더니 KBS ‘미녀들의 수다’로 잘 알려진 따루 살미넨으로부터 답변이 왔다. (넉살스러울 정도로 한국어를 잘하는 그는 2007년 대사관에 채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따루가 소개해준 이가 람스테드의 자리를 이어받아 헬싱키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직을 맡고 있는 김정영 박사다. 그녀에게 e-메일을 보냈더니 람스테트의 생전 연구물과 서신들이 자신의 연구실에 보관돼 있다며 흔쾌하게 취재에 응해줬다. 영국에서 한국어 음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2001년부터 헬싱키대에 가르치고 있다.

김 교수의 말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때의 이론’의 유적은 초라하다면 초라했다. 원본은 도서관이 이동정리 중이라 찾기 힘들고, 복사본이 박스에 정리돼 보관돼 있었다. 모두 다 해야 책장 세 칸 정도를 채울까. 1939년 쓴 ‘코리안 그래머(한국 문법)’과 몽골어를 굉장히 잘했다는 그가 직접 쓴 서신 등이다. 고 고송무 교수의 동창으로 이 대학 동아시아학과의 비서를 맡았던 해리 할렌(Harry Halen)이 꼼꼼히 정리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람스테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이는 일본 유학생이었던 수애 류진걸 선생인데, 국내 자료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그와 람스테트와 함께 찍은 사진도 해리 할렌이 개인 소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영국인으로 이 대학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한국에서 보는 동북아시아’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앤드루 로기는 “람스테트가 한국어 문법책을 영어로 썼기에 한국전쟁 때 파병된 외국군의 한국어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우랄어와 알타이어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류바람, 판소리 같은 전통문화로 굳히기 해야

82년생인 앤드류는 굉장히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이다. 7월 영국에서 출간예정으로 북한인권 문제를 다룬 ‘The Answers: North Korea’를 집필했고, 18세기 북학파 학자 유득공이 쓴 한국고대역사서 ‘이십일도회고시’를 영어로 번역중이다. 영화에 대한 조예도 전문적이어서 알고 보니 지난달 개봉한 독립영화 ‘두레소리’(감독 조정래)의 공동 촬영감독을 맡았다. 10대 시절 영국 검도도장에서 한국인을 만나게 돼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런던대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복수전공했다고 한다. 대학입학 후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했고, 5년 전부터 조정래 감독과 작업하고 있다. 조 감독과의 다음 작품은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것이란다. 문화부에서 의뢰한 판소리 인간문화재를 다룬 기록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앤드루는 유럽에서의 한류 바람이 마니아의 경지를 넘어섰다며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 수가 많이 늘었다고도 했다. 또 앞으로 한국과 핀란드의 상호교류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단다. 그에 따르면 한국와 핀란드의 구비문학의 유사점이 가교가 될 것 같단다.

김정영 교수도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며 핀란드인 학생들로부터도 자신이 잘 몰랐던 한국드라마를 추천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류 거품은 금방 꺼질 수 있다며 일본의 문화에 핀란드인들이 매료되는 것을 특기했다. 한국의 국가 이미지 고양에 더욱 힘써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 휴대폰, 기아 자동차 같은 기업의 활약을 꼽기도 했다. 앤드루도 판소리 같은 전통문화가 해외에서 영향력을 더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현재 헬싱키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은 10명, 한국어 수강생은 50여명이며 이들이 핀란드 고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될 날도 곧 올 것 같다고 하니 왠지 뿌듯해진다.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