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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년의 숨결’ 선교장의 사랑방, 지금도 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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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년의 숨결’ 선교장의 사랑방, 지금도 친숙

‘향기있는 책방’ ‘갤러리 로터스’ 등 독자 위한 공간

제주 햇빛 가리기 위한 구조물과 돌담에서 아이디어
동서양 미술과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예술서적 출판


■이대희의 맛있는 토스트북-열화당

세계유일의 출판도시인 ‘파주출판단지’. 처음 파주출판도시에 가본 사람에게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87만5343㎡(약 48만평)의 넓은 대지에 4층 높이의 가지런한 모습과 반대로 특이하고 개성적인 건물 각각의 외모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허허벌판이었던 땅이 출판사 130개, 인쇄관련회사 57개 등 출판관련 업체 213개의 보금자리로 탈바꿈하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출판도시가 탄생하게 된 것은 열화당 이기웅 대표의 노력과 뜻을 같이한 출판사 대표의 책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파주출판도시의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이기웅 대표가 경영하는 열화당 출판사. 자, 그럼 오늘은 열화당으로 출판 여행을 떠나보자. 가끔은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출판사 여행을 떠나기에는 파주만한 곳도 없다. 한강을 끼고 시원한 자유로를 힘차게 달려보자.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길이 펼쳐지는 예쁜 자유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파주출판도시’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시간 내외 정도의 거리에서 책의 도시를 만날 수 있다. 파주출판도시로 가는 교통편으로는 2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합정역 2번 출구에서 좌석버스 2200번이나 파주출판도시 로고가 새겨진 셔틀버스(유료)를 타면 35분 정도 걸린다.

파주출판도시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건물들로 인해 눈이 바빠진다. 출판사 하나하나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우선 열화당 출판사를 찾아보자. 열화당은 출판도시 초입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풍력발전소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첫 번째 사거리를 지나면 조그만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응칠교라 부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옆에 고고한 학의 모습을 닮은 건물이 이방인을 반겨준다. 이곳이 바로 열화당 출판사다.

열화당이라는 출판사 이름이 독특하다. 열화당이란 이름은 이기웅 대표의 고향집인 강원도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마지막 구절에 ‘가까운 이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라는 뜻이다.

▲ 이기웅 대표의 고향집 강릉 선교장.열화당 출판사를 둘러보기 전에 먼저 강릉에 있다는 선교장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도 저마다 출판사 이름을 짓는 데에는 남다른 의미와 수많은 고민이 묻어 있을 터. 열화당을 알기 위해서는 선교장의 사랑방에 잠시 머무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선교장(船橋莊)은 강릉의 아흔아홉 칸짜리 조선시대 고택(古宅)으로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곳이다. 지은 지 300년 된 선교장은 입구의 행랑채부터 시작해 안채와 사랑채(열화당), 동별당, 사당, 큰 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한옥의 멋에 선교장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영화 ‘황진이’를 비롯해 ‘식객’, 드라마 ‘일지매’도 선교장에서 촬영됐다. 그중에서도 예전에 MBC 인기 드라마였던 ‘궁’서 황태자비로 열연한 윤은혜가 황태자 이신 역의 주진훈과 여름별궁으로 여행을 갔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황진이, 헬로 애기씨, 한성별곡 등 많은 드라마 세트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친숙한 곳이다.

한편 선교장의 사랑방인 열화당은 1815년에 건립되어 이백 년에 가까운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열화당은 많은 옛 서화(書畵), 전적(典籍)들이 수장‧보존되어 있어서 예로부터 문인, 학자들이 모여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논하고 진리를 모색하던 학문의 사랑방이다. 또한 문집과 족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담은 서책 등을 펴냈으며, 1900년대 초에는 ‘동진학교(東進學校)’라는 신교육기관이 개설되는 등 학문과 교육이 이루어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열화당의 이기웅 대표는 고향이기도 한 선교장에서 유년의 세월을 보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도서출판 일지사에서 근무하면서 출판에 뜻을 두었다. 이후 1971년에 예술전문출판사인 지금의 열화당을 세워 본격적인 출판의 길로 들어섰다.

열화당은 동서양의 다양한 미술과 한국 전통문화에 관한 책을 만드는 출판사다. 열화당 출판사의 건물은 플로리안 베이겔(Florian Beigel), 필립 크리스토(Philip Christou)와 김종규 교수가 공동 설계한 작품이다. 건물의 형상과 빛깔은 제주도의 햇빛을 가리기 위한 검은 구조물, 현무암 돌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검게 그을린 건물 빛깔을 보니 제주도에 온 느낌이 물씬 오른다.

▲ 열화당 북카페양쪽의 거대한 현무암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의 입구를 따라 길 안쪽에 현관문이 있다. 정문이라고 보기에는 생각보다 작은 출입구가 답답함을 주지만 밝고 화사한 색의 무늬유리벽이 오히려 돋보여 시원한 청량감을 준다. 정문에 왼쪽으로 보이는 곳이 ‘향기 있는 책방’이다. 이곳은 열화당이 펴낸 예술 책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갤러리 로터스’ 전시관이 손님을 맞는다. 다른 출판사들의 경우는 업무적 공간으로 건물을 닫아놓는 경우가 많지만 열화당은 1층을 서점과 전시장으로 일반인들에게 항시 개방한다. 전시관은 당연히 무료다. 또한 서점에서는 열화당의 아름다운 서적들을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할 수도 있다.

1, 2층은 출구 쪽 마당과 연결되어 전시 공간으로 사용된다. 열화당 도서전시관 ‘향기 있는 책방’과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로터스’ 두 곳, 그리고 직원 및 작가를 위한 휴식 공간 한 곳, 이렇게 모두 다섯 개의 스튜디오 하우스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각각은 모두 독립된 계단으로 연결된 층과 다른 두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청아한 풍경소리가 울린다. 손님의 인기척을 대신한 풍경소리에 직원의 친절한 미소가 맞아준다.
자작나무와 적삼목, 그리고 무늬강화유리로 이루어진 외벽과는 달리 내부는 답답함을 덜어주려는 듯 밝은 흰색의 벽과 바닥이 통일감 있게 편안함을 더해준다. 게다가 부분 조명이 벽에 반사되어 화사함을 띄었고, 전시된 도서와 장식품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좀 더 눈길을 돌려 세심하게 돌아보면 조명보다 더 빛나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한쪽 벽에는 미술 비평가이자,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르는 영국 출신 작가 존 버거(John Berger‧1926~ )의 사진이 걸려있다. 주변에는 각종 수집품과 장식품이 잘 전시되어 있다. ‘향기 있는 책방’의 특징은 책만 있으면 다소 심심하고 밋밋할 수 있는 공간을 여러 가지 소품과 장식품 등을 이용해 한층 멋스럽게 꾸몄다는 점이다. 더구나 세련된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비롯해 구석구석 열화당의 손때가 묻어난 물건들이 출판사의 느낌을 잘 전달해준다.

옆방으로 걸음을 옮기면 ‘갤러리 로터스’라는 테마 전시 공간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갤러리 로터스’는 예술과 건축 사진 등 다양하고 격조 높은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격조 높고 뭔가 있어 보인다고 하여 관람료가 비싸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갤러리 로터스’가 반가운 이유는 관람이 공짜라는 사실이다. 또한 한번쯤 격조 있는 분위기를 내볼만 한 공간인데다가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마음이 더욱 풍요롭다.

‘갤러리 로터스’를 지나면 한쪽 공간에 직원 휴게실을 겸한 게스트 룸이 있다. 이곳에서도 이기웅 대표의 수집품들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책들과 주류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어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다. 치명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회의실로 들어서면 우리의 옛 창호 문을 연상시키는 아크릴 벽이 있고, 그 벽을 뚫고 나오는 미색의 연한 빛이 회의실 분위기를 온화하고 부드럽게 해준다. 딱딱하고 지루한 회의를 한결 부드럽고 지루하지 않게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2층은 왼쪽 ‘향기 있는 책방’을 통해 올라가거나 정문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다. ‘향기 있는 책방’을 통하면 옛 고서와 전시품을 보면서 올라갈 수 있고, 중앙계단으로 직접 올라가면 곧바로 기획부와 디자인실로 들어서게 된다. 2층에 위치한 디자인실은 부서의 성격(?)상 밝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외벽은 무늬가 있는 창이라 그런지 날씨와 상관없이 강한 빛이 들어온다. 오히려 빛이 너무 강해서 롤스크린으로 가렸지만 디자인실이 은근한 빛으로 채워져 운치가 있어 보인다.

3, 4층은 서재와 작은 주거 기능을 갖는 파빌리온으로 1, 2층 스튜디오 하우스들의 옥상 테라스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구조다. 외관에서 주는 첫 느낌은 직선 구조에서 단순하지만 높이를 달리해 꽤 세련된 갤러리를 보는 것 같다. 열화당 외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색의 변화도 그렇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공간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3층은 편집부와 회의실로 꾸며져 있다. 대중서보다는 전문서적을 주로 편집하는 곳이라 책장에도 전문서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조금은 좁은 듯 배열된 책상들이 오히려 내 집처럼 편안하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편집부의 분위기는 거의 도서관 같다. 아마도 편집이라는 독특하면서 창의적인 작업을 한다지만 마감 시간과 또 제각각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일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4층은 이기웅 열화당 대표의 개인주거용으로 쓰고 있단다. 일산에 집이 있지만 책이 좋아 이곳에서 생활한다고 하니 가히 출판도시의 수장(?)이라 할만하다.

열화당과 함께한 이기웅 대표는 초심을 잃지 않고 한 길을 걸어온 몇 안 되는 출판인이다. 열화당은 조선후기의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을 모은 ‘벽위편’을 복각하여 첫 출판물로 선보인 뒤, 1975년부터 ‘미술문고’와 ‘미술선서’를 펴내면서 예술전문출판사로서의 토대를 다졌다. 또한 ‘한국의 굿’, ‘한국의 고궁’, ‘한국 기층문화의 탐구’, ‘한국의 탈놀이’, ‘교양한국문화사시리즈’ 등을 통해 한국 전통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위대한 미술가의 얼굴시리즈’를 프랑스와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예술서를 향한 열화당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영상시대에 발맞추어 ‘영상원 총서’를 펴내고,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화화한 프랑스 만화를 출간하는 등 시각예술에 대한 유연한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밖에 ‘우리 문화예술론의 선구자들시리즈’, ‘열화당 미술책방’ 등을 간행하며 예술전문 출판사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대표적인 출판물로는 작가와 이기웅 대표가 1985년부터 3년간 경주시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공들여 펴낸 ‘경주남산’과 전국에 현존하는 서원 64곳을 통하여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되짚어본 ‘서원’ 등이 있다. 1998년 ‘서원’으로 한국백상출판문화상에서 출판 기획 부문에서 수상하였으며, 1999년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로 장정 부문, ‘몽골의 암각화’로 편집부분에서 수상하였다.

열화당에 대한 이기웅 대표의 애정은 출판사 옆에 짓는 건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건물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거나 혹은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열화당 출판사 옆에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짓는 이 건물은 바로 열화당 이기웅 대표의 집이다. 출판사 옆에 개인 집을 짓는 일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 아니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집도 역시 열화당을 지었던 플로리안 베이겔이 이기웅 대표가 자란 강릉의 선교장에서 머무르며 얻은 영감을 반영해 설계했단다. 어떤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할지 궁금하고 자못 기대된다.

이 건물의 대체적인 구조를 잠깐 살펴보자. 이기웅 대표는 본인의 공간을 침대 대신 이부자리를 놓는 등 한국식으로 꾸밀 생각이란다. 역시 전통의 멋과 자긍심이 엿보인다. 강릉 선교장에 있는 ‘활래정’을 연상시키는 다실(茶室)도 세워진다. 건물 1, 2층에는 이기웅 대표와 열화당 직원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은 ‘좋은 책’을 전시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 들어설 계획이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대되는 곳이다.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할지는 모르겠지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책방’이 탄생한다는데, 마음으로라도 응원을 보낸다.

이기웅 대표의 책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좋은 책이란 각 분야에 대해 정확하고 진실한 말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말에서 충분히 느껴진다.

요즘 출판계는 각 출판사의 크기와 규모와는 상관없이 뚜렷한 색깔이 없다고들 한다. 아동, 사진, 경제경영, 문학, 실용, 인문 등 각자 나름의 색깔로 독자들에게 호소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대부분 종합출판사를 표방하고 있다. 물론 유례없는 출판 불황과 독자들과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자구책이 이러한 현상을 낳았는지 모르지만, 열화당은 창립 이례 지금까지 변함없이 건축, 예술, 사진 등을 중심으로 예술전문출판사의 면모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도 열화당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출판사로 남기를 기원한다. 더불어 이번 방문은 나에게 있어서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출판사를 만난 소중한 시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