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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냄새가 그리워 난 詩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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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냄새가 그리워 난 詩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해직이라는 시대적 아픔 가슴에 묻고 서정성으로 승화시켜


고향 평양과 비슷한 북한강변에 살며 통일의 그 날 기다려



▲ 국내 최초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했던 황영걸 시인./사진=문승연 기자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닌 하얀 백발의 노신사 황명걸(78) 시인. 질끈 동여맨 은빛머리 위에 눌러쓴 야구모자가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보면 볼수록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노 시인의 삶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단 세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시화집을 펴낸 황 시인은 과작(寡作)임에도 다작(多作)하고 있는 그 어떤 시인의 무게감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울다 지쳐 잠이 든 아이야…”로 시작되는 『한국의 아이』를 비롯해 『내 마음의 솔밭』과 『흰 저고리 검정 치마』 등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큰 울림 탓이리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텃밭과 함께 전원생활을 했던 그는 부인의 건강을 염려하여 요즘 양평군 강상면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좋아하던 담배는 끊었고, 가끔씩 소주를 즐겨 마시는 황 시인은 요즘 서각을 배우며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다. 옛 문인화의 전통을 이으려는 듯 시서화(詩書畵)에 열중하고 있는 그를 만나 시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주>



-고향이 평양이신데, 한번 가보고 싶지 않으세요.


“고향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 남북 문학인 교류나 이산가족 상봉 등과 같은 이벤트성 행사에 참가하는 식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 양평은 대동강변을 끼고 있는 평양과 비슷해 은퇴하자마자 이사를 왔는데 이곳에서 조용히 살다보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 아직도 동네, 강가, 강너머 섬, 저쪽 멀리 철교, 동평양, 그리그 그 옆의 야구장 등 고향의 모든 게 다 기억이 나. 처음 서종면 문호리로 이사 왔을 땐 북한강을 대동강 삼아 위로하면서 살았지.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져 한강이 되듯이, 우리나라도 남과 북이 하나 되어 통일이 됐으면 해. 그 염원을 담은 시가 「두물머리에서」야.”

-6‧25가 나고 제주도로, 부산으로 피난을 다니셨는데요, 시대적 아픔이 시인으로 만든 측면도 있네요.


“없지 않아 있지. 제주도로 피난 가서 소설가 계용묵 선생을 만났고, 제주 칠성통에 있던 책방에서 책을 읽으며 문학의 싹을 틔웠지. 게다가 제주에는 당시 월남한 홍정명 화가가 화방을 운영했는데,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 씨가 제주경찰학교 교수를 하며 다녔어. 그런데 그 양반이 프랑스 책을 끼고 다니는 거야. ‘아, 경찰학교 선생이 불어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때부터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셨던 거지. 당시 프랑스를 처음 알게 되었고 동향인 황순원 선생(서울고 은사)이 제주로 계용묵 선생을 만나러왔다가 우리 집에서 운영하는 냉면을 드시러 왔지. 아버지와 나이도 비슷한데다가 고향도 평안도인 그는 단편소설을 쓴 계기가 프랑스 작가 샤를 루이 필립 때문이라며 나중에 문학을 전공하면 그 사람을 연구해보라고 하셨어. 황순원 선생은 원래 시를 쓰다가 소설로 전향하셨는데 샤를 루이 필립을 연구하면 당신이 단편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 그래서 나도 졸업은 못했지만 서울대 불문학과를 갔지.”



-제주도에서 시인과 화가가 될 운명을 만나셨네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시보다는 그림에 더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아버지가 미대는 가지 말고 의대를 가라고 했지. 난 문리대의 ‘리’(理)가 ‘이과’라고 우기며 문리대 불어과를 간 것이지. 만약 미대를 갔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겠지. 불문학과를 갔지만, 학문은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시를 쓰고 싶어 학교생활을 등한시했어. 군대에 갔다가 오고 이러저러하다보니 복학을 못해 결국 졸업을 못했지.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지만, 황순원 선생에게 불문학자가 되어 샤를 루이 필립 소설을 연구하겠다고 해놓고 못한 게 죄송스러워.”

황 시인의 그림에 대한 꿈은 인생 황혼녘에 이루어졌다. 지난해 인사동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시와 그림을 묶은 시화집을 펴내면서 시화전을 개최한 것이다.

-1991년 서종문 문호리로 이사 오셔서 국내 최초로 갤러리 카페 ‘무너미’를 운영하셨는데….


“정년퇴직 후 1991년 무렵 동네에 같이 살던 화가 한 분과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다 양평을 찾았지. 건축설계사인 아들이 예쁜 집을 지어주었는데, 전기누전으로 그만 불이 났어. 예술을 하는 후배들이 복구작업을 한 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동네 사랑방을 겸한 카페를 차리자고 제안해 ‘무너미’라는 갤러리 카페를 운영하게 됐지. 노인네 수입도 생기고 집 고치느라 돈도 안 들고…. 참 좋은 생각이었지. 갤러리 카페에 여러 사람 작품을 가져다 놓고 전시도 하고 후배들이 작업한 도자기를 가져다 놓고 팔기도 했어. 그림이 있는 갤러리 카페로서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장사도 잘 되고, 그 후 카페 붐이 일면서 여기저기서 견학을 왔어. 후배들이 고마웠지.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너무 장사가 잘 되어 주변에서는 시샘도 하고, 관가에서는 난데없이 불법단속을 나왔어. 우리는 착실하게 카페 증축 허가를 준비 중이었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목(地目)이 변경돼 절대농지가 된 거야. 땅 주인 모르게 지목을 변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공고를 했다는 거야. 결국 허가를 못 내어 무허가 영업을 한다고 고발당했어. 위생법과 농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갔었지.”

갤러리 카페 무너미는 더 이상 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후에 황 시인은 옥천면 아신리로 와서 다시 카페 ‘쁘띠쁘랑스’를 열었다. 이 때 세 번째 시집이자 자신의 고희를 기념하는 시집인 「흰 저고리 검정 치마」가 나왔다. 지난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왔던 북쪽 여대생 응원단의 이미지가 아름다워 제목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해직을 당하시는 등 현실에 대한 아픔이 남다르신데….


“동아일보 월간부(잡지)에 있었는데, 똑똑한 기자들이 자유언론을 내세우고 들고 일어나니까 나도 대세를 좇았지. 동아‧조선 합해서 280명이 해직됐어. 민주화투쟁이라기보다는 복직투쟁을 하다가 먹고 살아야 하니 취직을 했지. ‘미술과 생활’이라는 미술잡지 편집장으로 1년 간 있다가 다시 LG그룹의 사보편집장으로 일하게 됐지. 재벌기업에 있으니까 동료들한테는 미안한 마음이 들고 해서 글을 쓰게 한 뒤 원고료를 몇 배 많이 줬어. 미안함을 없애기 위해서였지. 세월이 지나서 민주화가 됐고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니 이전까지 따라다니던 형사도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 민주화 표창까지 받았잖아. 나이 들고 나중에는 조용히 살아왔어. 해직 당하자마자 나온 시집 『한국의 아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정시를 써온 셈이지. 첫 시집은 나오자마자 판금되어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 프리미엄이 붙어서 암암리에 팔리기도 했어.”

-당시 발표한 ‘한국의 아이’가 판금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회참여, 현실비판, 저항의 목소리가 담긴 시들이 담겨 있으니까 판금 당했지. 그런데 서종면 문호리에 와 카페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참여시가 아닌 서정시를 썼지.”

-왜 더 많은 시들을 발표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공부도 해야 하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하고 훈련도 많이 해야 해. 말하자면 늘 시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게을리 하니 시가 잘 안 되는 거야. 또 돈도 벌고 싶고, 놀고 싶기도 하고, 멋도 부려보고 싶으니까, 소위 곁눈질하니까 시가 안 돼. 시가 안 될 때는 그림이라도 그려보자는 생각에 소품을 그렸는데, 이제는 대작을 그려서 마지막으로 전시를 한 번 더 하고 싶어.”

-언론 춘추전국시대다보니 언론이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라는 권력에 더 아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언론들이 너무 어수선해. 동아, 조선, 중앙, 매일경제 등 잘나간다는 언론은 모두 대중취향적이고 상업적이야. 예전에 내가 해직될 때도 조선과 동아는 다 장사가 잘되던 신문인데 더 잘되기 위해서 권력에 아부한 거지. 요즘에는 정치권력이 아닌, 자본권력에 아부하며 올곧은 목소리를 안 내는 거야. 그래서 집에서는 아예 신문을 보지도 않아. 보나 안 보나 똑같으니 볼 필요가 없는 거지.”



-디지털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의 감성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도 안 읽히고, 시 한편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가 잘 안 읽혀 시인으로서 참 안타깝지. 미국 시인 이이 커밍스는 디지털 문명이라는 시대를 따라서 타이프를 치지만 이름만큼은 직접 사인을 하고 싶다고 시를 쓴 게 있어. 그런 식으로 아날로그 시대가 그리워지는 거야.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된 ‘디지로그’를 얘기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아날로그가 그리워.”

황 시인은 아날로그 감성이 필요한 건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디지털 문명으로 대표되는 스마트폰 때문에 나중에 머리가 많이 나빠질 것 같다는 얘기다.

/noja@g-enews.com/노정용 기자




두물머리에서



겸재의 「족잣여울」보다야 못하지만

북한강 남한강 두 물 합치며 묘를 이룬

한 폭 청록설채화, 두물머리에 서면

끝내 서울은 가본적으로 남고

본향은 역시 평양, 그리움으로 살아난다



이름처럼 수양버들 하늘하늘 춤추는

내 고향 평양시 유동 대동강가

할머니도 어머니도 이모도 고모도

버들처럼 맵시났다. 기생처럼 고왔다

고대 위 고래등 같은 요릿집 아래

푸른 강심에 유유히 떠도는

울긋불긋 용두머리 장식한 기생배에선

풍악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

매생이 타고 맞은편 양각도로 건너가

형들의 고추 굵기만한 희멀건 메를 캐고

멀리 선교리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샛강에서 조개를 잡느라 정신없었다



대동강가 고향 그리워 양평에 살며

아침에는 북한강 물안개에 할머니 뵙고

저녁에는 남한강 잔물결에 삼촌들 만나고

사방이 시원히 트인 두물머리에 서서

북한강 남한강 두 물 합쳐 한강을 이루듯

남 북이 하나되어 고향길 열리길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