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자기 능력의 한계 넘어 환상세계에 도전

공유
0

자기 능력의 한계 넘어 환상세계에 도전

김용만의 세계문학기행(8)-도스토예프스키와 극점(極點)의 미학(상)

간질병마저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황홀감으로 느끼는 여유


앙드레 지드, 카뮈, 헤르만 헤세 등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작품서 영향



▲ 도스토예프스키

[글로벌이코노믹=김용만 소설가] 오일 달러 덕인지 백야(白夜)에 드러난 페테르부르크의 시가지가 전보다 훨씬 깨끗하고 세련돼 보인다. 몇몇 귀족의 부귀영화를 위해 대다수 농민이 짐승만도 못하게 살다가, 혁명을 일으켜 황제 니콜라이2세를 처형하고,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체제로 변신하여 미국과 맞겨뤄온 초강대국 러시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여 과학 선진국으로 우뚝 섰으면서 하루아침에(1991) 연방체제가 무너져 14개의 나라가 떨어져나간 러시아.

하지만 러시아에는 그 상처 입은 거인의 정치적 이미지를 경건하게 정화시키는 순결이 녹아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가 늘 내 머리 속을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창녀인 소냐는 바로 순결의 상징인 셈이다. 러시아를 온통 순결로 정화시킨 창녀 소냐. 러시아의 어떤 힘이 귀족의 허위의식을, 공산독재의 시행착오를 일시에 순결이라고 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이미지로 정화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쓴 작품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창녀처럼 무시당하고 싶어. 창녀촌에나 가야 겨우 대접받는 인간. 그래야 세상을 무시할 수 있거든.”

작중인물의 말을 통해 표출한 이 아포리즘은 바로 내 서민주의이자 휴머니즘의 색깔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창녀의식은 내 나름의 내용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 나보다 더 천하고 못난 게 없으니 그 이상의 내 위상은 모두가 덤이다, 라는 그 내용주의는 어쩜 가장 강력한 자신감인지도 모른다.

▲ 눈이 내린 가운데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도스토예프스키 생가선과 악, 진실과 위선, 열등과 자만처럼, 상반된 대극점에 두 발을 디딘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넘어 환상세계로 도전하려는 극단적인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평생 괴롭힌 간질병마저 지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는데, 발작 직전의 황홀감을 높은 탑의 정점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심리탐구적인 창작 성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니체는 그런 도스토예프스키를 일러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심리학자”라 했고, 키릴로프를 짜라투스트라의 원형으로 삼음으로써 『악령』의 작중인물에 불과한 키릴로프를 불후의 인물상으로 남게 했다. 그 외에도 여러 문인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메레즈코프스키는 종교적 경향을, 앙드레 지드는 무상진여를, 헤르만 헤세는 아시아적 철학을, 카뮈는 부조리를, 셰스토프는 허무적인 절망의 철학을 캐내어 자기 문학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런 도스토예프스키의 독창성은 루카치의 말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선언했는데 그 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이 종래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뜻이다.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에 가입한 도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4월 페트라셰프스키의 집 모임에서 고골리에게 보내질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가 그 ‘사악한’ 편지 내용을 퍼뜨린 죄목으로 체포되는데 평론가 벨린스키는 절대왕정을 옹호한 작가 고골리를 비난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푸리에가 실현시키고자 한 공상적 사회주의란 사랑과 협동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엥겔스가 붙인 이름이다.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집행 현장인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 첫 번째 사형수가 죽고 다음 차례에서 총살되려는 순간 황제의 특사로 강제노동형에 처해져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그해 겨울 트볼리스크에 도착한 그는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아내들의 방문을 받았으며, 그 중에는 10루불 짜리 지폐를 복음서에 숨겨 건네준 부인도 있었다.

▲ 도스토예프스키 서재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의 유형생활을 마친 도스토예프스키는 장교로 제대했는데도 사병으로 강등되어 세미팔라친스크에 주둔 중인 제7국경수비대에 편입됨으로써 6년간의 병사생활이 새로 시작된다. 그는 얼굴에 낙인이 찍힌 죄수들과 어울리면서 살인범 같은 잔혹한 범죄자도 아름답고 진실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런 체험세계를 『죽음의 집의 기록』에 생생히 기록한다. 엄혹한 군생활 중에도 창작의 열정을 억누를 수 없던 그는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곤차로프, 칸트, 헤겔 등의 저서를 탐독하며 부지런히 작품을 쓴다. 그가 세무관의 아내이며 학교 교사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와 사랑에 빠진 것도 그 무렵이다. 마리야는 이듬해 남편이 죽자 고심 끝에 아들이 딸린 과부의 몸으로 도스토에프스키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서른여덟 살에야 하사관으로 제대한 도스토예프키는 페테르부르크에서의 거주를 허락 받고 10년 만에 시베리아를 떠나지만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다. 훗날 톨스토이가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극찬한 『죽음의 집의 기록』을 출간할 때도 불온한 내용들을 삭제한다는 조건으로 검열 당국의 허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념에서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을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러시아에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가 만연했으며 그런 급진적인 사상은 군주제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원형이 된 『무신론자』를 구상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 사건’이 터지자 그거에 깊이 빠져든다. ‘네차예프 사건’이란 페트로프스키 농과대학에 재학중인 네차예프가 동창생 5명을 모아 만든 비밀결사조직인 ‘민중의 복수’가 변절자 이바노프를 암살한 사건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처남이 피해자인 이바노프와 친구 사이여서 그 내막을 소상히 알게 된다.

“나는 놀라운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구상에 불과합니다만 틀림없이 대중들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시인 마이코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고조된 감정을 잘 드러낸다. 또 훗날 그의 전기를 쓴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가 『악령』에 매달린 흔적이 엿보인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이렇게 고심한 적이 없습니다…. 너무 힘겨운 테마를 택한 듯싶습니다.”

그처럼 『악령』의 모티브가 된 ‘네차예프 사건’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스타브로긴이라고 하는 매력적이고 전위적인 인물을 설정하는 데에 기제로 작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해낸 여러 인물 중에서도 스타브로긴은 성격구조가 가장 난해한 인물로 그를 이해하면 『악령』을 이해한 거나 진배없다.

▲ 센나야 광장부유한 장군 미망인의 외아들로서 명석한 두뇌와 수려한 용모와 강건한 체력을 지닌 청년 스타브로긴은 매력적인 청년이면서도 상식과 전형을 거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다. 연회장에서 아무 이유 없이 귀족의 코를 잡고 끌고 다닌 안하무인에다, 춤추던 귀부인의 입에 강제로 키스를 퍼붓고 관청에서 자기를 계도하려는 현 지사의 귀를 잘근잘근 깨문 치한이며, 빈민가의 어린 소녀를 겁탈하여 자살하도록 만들고 목매는 모습을 세밀히 관찰한 악마인가 하면, 술김에 내기한 약속 때문에 절름발이에다 광기가 이글거리는 여자와 결혼한 미의식의 반역자인 동시에, 과격한 성격대로 행동하고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며, 화려한 상류사회의 환영을 마다하고 탐욕과 방종이 우글거리는 추악한 빈민굴에 몸을 맡긴 낭인인 데다, 자유주의에 길들어져 인간의 본질적인 과제를 풀려고 몸부림치는 무신론자에, 일상적인 관습이나 도덕규범은 물론 법률까지도 무시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무법자이기도 하다. 그가 자기 집 2층 골방에서 목매달아 죽을 때 사용한 비단끈은 미리 준비한 것으로 거기에는 비누가 잔뜩 칠해져 있었다.

『악령』에는 상징적인 존재 스타브로긴 말고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작품을 통해서 가장 독창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키릴로프가 있다. 인신사상(人神思想)의 주창자인 키릴로프는 자기 의지력의 한계를 시험해보려고 환상적인 자살을 결행한 그야말로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처럼 난해한 인물들을 창조해 낸 도스토예프스키의 독특한 문학세계는 그의 예술적인 재능과 도시문화적 취향, 드라마틱한 생애, 그리고 새로운 자유사상의 물결이 도도하게 유입되는 러시아 사회의 현실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 선배 작가인 고골리를 흠모하여 “내 문학은 고골리의『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고통스런 현실에서 자유로운 환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물을 즐겨 설정했다.

1865년 첫 번째 장편인『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하기 시작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배경 설정을 위해 센나야 광장 쪽을 자주 산책하며 언제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몇 시에 경찰관이 순찰을 돌고, 사람들이 언제 귀가하는지를 꼼꼼히 살피고 연쇄살인을 범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알리바이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 같은 신성한 인물을 그리고 있는 데다, 각혈하다 숨을 거둔 아내 마리야와 생전에 겪었던 갈등의 회한, 함께 「시대」지를 발행하며 의지해온 형 미하일과 자기의 문학을 이해해준 친구 그리고로예프의 죽음, 형의 가족까지 책임지는 바람에 출판업자에게 3000루불을 받고 모든 저작권을 팔아넘겨야 했던 절박한 생활비, 정간된 「시대」지 대신 새로 발간한 「세기」지의 적자운영으로 짊어지게 된 부채, 아내가 죽고 나서 새로 사귄 코발레프스카야 부인의 청혼 거부, 도박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열패감, 점점 심해지는 간질병, 그런 것들은 한꺼번에 감당하기 힘든 짐이었을 것이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자선 병원 의사인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상인계급 출신의 어머니 마리야 네차예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표도르는 외조부인 표도르 네차예프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으로 외조부는 그의 대부이기도 하다. 열세 살 때 전원 마을인 다로보예에 머문 그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의 작품을 읽으며 지내다가 형 미하일과 함께 중학과정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들어간다. 그 후 열여섯 살 때 존경하는 푸슈킨이 결투로 숨진 데다 어머니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어린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듬해 그는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당시 명문학교인 중앙공병학교에 입학하고, 2년 후에는 하사관으로 임명되어 군생활을 시작하지만 엄격한 규율이 적성에 맞지 않아 외톨이가 된 채 발자크, 호프만, 실러, 위고, 셰익스피어, 괴테 등의 작품을 탐독한다.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