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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가 떨어져 흙에 묻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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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가 떨어져 흙에 묻히고…."

[정경대의 의학소설-생명의 열쇠(18)]

[생명의 열쇠(18)]


3. 볼 수 없는 존재


"열매가 떨어져 흙에 묻히고…."


[글로벌이코노믹=정경대 한국의명학회장] 수민이 좋아라하며 손바닥까지 마주쳤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찡하였다. 오빠가 그런 생각까지 다한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잃은 회한에 괴로워하다가 타인의 건강을 위하자는 마음의 발로임이 분명했다.

“네가 찬성하니까 이제 마음이 확실해졌다. 실은 네가 반대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내가 언제 오빠가 하는 일 반대하는 거 봤어? 무조건 따랐지……. 그런데 오빠, 체질이란 거 나도 배울까? 아냐 정말 배우고 싶어.”

“넌 시집이나 갔으면 좋겠다. 하긴 배워두면 좋겠지.”

“시집은 싫어! 오빠가 장가가면 그때 가서 나도 생각해볼게. 아직은 여기서 살고 싶어 엄마 아빠 산소에도 매일 가볼 수 있고……. 그나저나 약초밭은 누가 돌보지?”

“성식이 아저씨한테 부탁해놓았어. 그동안 우리 집일 도맡다시피 하셨고 어차피 앞으로도 그러실 거니까 잘 관리해주시겠지.”

성식이란 사람은 소산의 오촌 당숙이다. 소산과 나이 차이가 별로 없어서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지냈다. 살림살이가 넉넉지가 않아서 소산의 아버지 때부터 내 집처럼 드나들며 약초밭 일을 해온 터라 각별한 사이였다. “나도 방금 성식이 아저씨 생각했어. 우리가 서울 가면 아저씨더러 아예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시게 하는 게 어떨까? 그럼 나도 안심하고 오빠 따라 서울 가도 집 걱정 안 해도 되고.”

“너 말하는 게 정말 체질을 배울 마음을 굳힌 모양이구나! 좋아! 그럼 서울 같이 가자! 가서 열심히 공부해보자. 그리고 너랑 나랑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정말?! 그럼 집부터 얻어야 겠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원룸이라서 오빠랑 같이 불편해서 안 되니까 전세 하나 얻지 뭐. 그런데 배울 곳은 알아봤어? 학원 같은데.”

“아니 배울만한 학원은 없고 마침 대학교 후배가 있는데 김영덕이라고……. 학교 다닐 때부터 도를 닦는다며 산에도 들어가고 그러더니 지금은 체질진단을 해주면서 유기농식품 사업을 한다는 말을 들었어. 그 친구가 체질을 잘 본다던데 꽤나 유명한 모양이야. 그래서 연락을 했더니 좋아 하더라. 내가 약초 기르고 있는 걸 아니까 뭔가 사업적으로 생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산은 2년 후배인 김영덕의 기인(奇人) 기질을 잘 알고 있었다. 꽁지머리를 하고 수염까지 덥수룩이 기른 그는 도를 닦는다며 산중에 오래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한 도사를 만나서 체질진단과 약을 쓰는 법을 배웠다 하였다.

“김영덕이란 사람 도사겠네?” “도사라……. 하긴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 거야.”

소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속내는 부정적이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겸손하고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하며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성품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성찰의 과정이라 그는 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영덕은 배운 지식으로 이익을 탐하고 있어서 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성이 착해서 타인을 속여 제 배를 불리는 시정의 잡배는 아니란 점에서 가까이 해도 좋을 인물이었다.

“내가 보기엔 오빠도 도사 같은 걸? 근데 나는 오빠가 도사되는 거 싫거든.”

“도인이란 게 별게 아니야 너도 도인, 나도 도인, 도인 아닌 사람이 없다. 만물이 도로부터 나왔으니까 다 도인이지. 다만 그 행위가 도인다운가 아닌가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

“근데 오빠, 묻고 싶은 거 있어. 오빠가 체질을 배우겠다는 건 순전히 엄마 때문이지? 남들한테 베풀어서 엄마를 살리지 못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그런 마음 아닌가?”

수민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끄집어내도 좋을 대화여서 용기를 내 물었다. 그는 속을 꿰뚫어보는 수민의 질문을 듣고는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어머니로 인해 삶의 진로를 바꾼 자신의 결단이 옳은 건지 금방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잠깐 사이에 나왔다.

“수민아, 너의 질문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 철학을 전공한 궁극은 결국 타인을 위하는 데에 있다는 오래전부터의 생각을 지금 이 순간에 정립할 수 있었다. 너의 말대로 엄마 때문이기는 하지만 나의 오랜 꿈을 현실화하는 계기였다.”

“역시 우리 오빠야! 나는 오빠의 그런 마음이 좋아!”

수민이 유쾌하게 말했다. 어머니로 인한 회한을 타인을 위하는 것으로 잊으려 한다면 진실성이 없는 억지일 수도 있어서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게 뻔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수민아, 다행히 부모님이 우리가 한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땅과 약초를 남겨주셨으니까 더 바랄 것도 없고……. 하니 베풀면서 살아가자.”

소산이 차분하게 결론지어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서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 좀 세다 싶은 바람이 은행나무가지를 흔들고 떨어질 듯 대롱대롱 매달린 노란 은행 두어 개가 허공을 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열매가 제 몸에서 떨어져

다시 태어날 흙에 묻히네.

내 몸 영혼을 떠나보내면

넋은 흙이 돼 사라지겠지

그러나 혼 불이야 불멸이라

덕으로 살아 신의 집에서

생사 없는 영원을 살리라

/정경대 한국의명학회 회장(hs성북한의원 학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