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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마음의 감기, 사랑은 아픈만큼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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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감기, 사랑은 아픈만큼 성숙해진다

[장현주의 동양학에 묻고답하다(13)]누가 甲을 묻거든 코흘리개만하라

정인이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콩깍지 씌인 눈엔 모든 것이 어예쁘니…


내 여인의 찰진 움집에 살 것을 박아두면


무엇이 두렵고 부럽겠는가…

[글로벌이코노믹=장현주 한글한자성훈색형(聲訓色形)연구소장] 세상은 코흘리개 같은 마음으로 넘쳐난다. 다들 그냥 마냥 좋은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생각으로 되고 안 되고 따지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왜 그렇게 칠칠치 못하냐는 소리도 아랑곳없다. 콧물이 너무 번지면 슥 소매로 훔칠 뿐이다. 그럼 이번에는 소매까지 더쳤다고 할 것인가.

눈물은 마음으로 벌써 애탈대로 애탄 심정이고, 콧물은 그 심정이 건드린 뇌수란다. 아는가. 우리가 몸에서 가장 딱딱하다고 여기는 뼈도 기실 뇌수라는 물위에 떠있는 배라는 걸. 그런 나를 콧물이라는 뇌수로 실고 가는 건 탁 어느 대목에선가 얻어 걸린 마음의 감기, 사랑이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감기약이 있다고 하지 마라. 감기는 약으로 낫는 게 아니다. 그건 아플 만큼 제대로 아파야 아문다. 그렇더라도 딱지 앉은 생채기처럼 속살이 새것으로 살아나도 여전히 그랬던 흔적이 차곡한 것이다.

얼마 만큼의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다 자랐다고 한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옷의 더께로 내 마음이 가는 대로를 덮어버렸다는 걸 뜻하지, 절로 가는 마음까지 다 요량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 들어도 눈에 밟히는 사람은 그냥 어쩔 수 없이 그 언덕에 섰다. 현실적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없다는 게 무슨 대수냐.

▲지난10여년간53개국을돌며호응을얻은사회적기업'들소리'의한국음악레퍼토리'월드비트비나리'.
▲지난10여년간53개국을돌며호응을얻은사회적기업'들소리'의한국음악레퍼토리'월드비트비나리'.
그래서 세상 어디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저절로 벙글어져 웃는 사진 하나쯤은 품에 품고 있어야 한다. 꺼내보지 않아도 그 사진 안의 미소가 따뜻하고, 꺼내 눈 맞추면 함께 헤벌쭉이 되는. 그것은 누구도 24시간을 곁에 둘 순 없기 때문이다.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덜 같이 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그도 저도 할 수 없는 사람의 세 부류만 있느니. 그럼 세상 어디에 내가 안 사랑한 모르는 어떤 사람도 사라지는 거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릎 꿇어 뒤집어쓴 눈 콩깍지엔 모든 것이 어여쁘니. 그럼 눈만 뜨면 욕할 일도 삿대질로 맞대거리 할 사정도 사라지지 않겠는가. 세상에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마다의 전장터에 선 것 같은 건 세상 누구라도 코흘리개를 기실 품고 살기 때문이다.

릴케가 그랬다던가. 내 눈빛을 지우십시오. 나의 뇌수로 맥박 쳐 흘러 갈테니. 세상에 모든 글도 모든 음악도 어떤 그림도 막연한 대상을 상대로 쓸 수도 그릴 수도 없다. 릴케의 루 살로메는 그 글의 내용이요 출발이요 전부다. 거기에 어떤 선을 그을까.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너에게 가닿지 못하고 세상 누구도 건드리는 글도 음악도 아니다. 한 줄의 시는 그만큼이나 구체적인 대상을 갖는다. 내 코흘리개 마음이 슥 무심결에 닦아놓은 소매들이 기실 잘 된 그림이고 어떤 사람도 뭉클 시킨 퍼햅스 러브가 아닌가.

하루 더 자고 샌 세상이 이다지도 헛헛한 건 코흘리개들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몸은 아무도 춥지 않을지 몰라도 그래서 속으로 시커멓게 타들어간 뇌수는 맥박 쳐 차마 너에게로 흐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흐르지 못하도록 무수한 까닭들이 생겨난 때문에.
정인이란 남자의 여자가 아니라, 한 여인만의 바로 그 사람 한 남정이다. 그래서 명리적으로 나를 생하는 정인이라는 흐름을 타고서야 그 사람이 내 사람이 되고, 그 남정은 바로 그 여인으로 자기가 있어진(在) 그 시점에야 오로지한 서로가 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내 여인의 바로 그 정이야말로 내 남정을 몸으로도 맘으로도 ‘있게’ 하는 꼭 그 자리서 콱 꽂힌다는 걸. 그것은 그 살(土)쩍 속에 코흘리개 마음을 다 실어 쏟지 않으면 너는 나는 그냥 각각의 개별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의 정인이 있고, 남정의 재성(일간이 극하는)이 있을 때라야 서로 연인이 되고, 또 살과 뼈가 타는 저녁을 날마다 거르지 않을 혼례란 걸 한다. 옛날 결혼식은 당연 저녁에 했다. 요즘처럼 낮의 의식적 관습적 통념적 까닭의 사랑이 아니라 바로 직설적 꼬꼬재배만을 떠올린 개념이다. 그러니 창호문을 수도 없이 손가락 구멍 뚫어 그 얼레리 꼴레리를 함께 킥킥거리지 않겠는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담치고 병풍치고 금 그을 수 없어야 바로 그 정인이 남정을 있게 하여 뿌듯이 아침이면 저 대문을 걷어차고 라도 세상으로 진군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전해지고있는가장오래된한자로거북의등딱지나짐승의뼈에새긴갑골문(甲骨文;).
▲지금까지전해지고있는가장오래된한자로거북의등딱지나짐승의뼈에새긴갑골문(甲骨文;).
요즘 말로 세상이 필자에겐 안습이다. 필자 자신인들. 무수한 사람들 곁에 날마다 시끌벅적 살고 있다고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사는가. 우리 가슴 속 속말은 늘 버려진 채로다. 어쩌면 그 말을 꺼내면 걷잡을 길 없을 것이기에 더 감추고 꼭꼭 무싯돌까지 눌러둔 것인지도 모른다. 서낭당에는 그래서 말없는 돌들이 앉았다. 그렇지만 소원을 말로 옮는 건 말이 파급하는 파동의 힘을 비는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비나리는 누가 듣든 상관 않는 내 골수와 뇌수의 간절함으로 거기 있다.

무슨 거창한 말로 서두를 꺼내도 우리는 그저 사랑하고플 뿐이다. 그래서 글을 만들고 말을 실어 더 멀리 멀리 새처럼 날려 보내려고. 언젠간 저 풍랑 바다에 띄운 내 사람이 둥둥 띄워 보낸 병속 편지를 받으려나.

한자를 풀다보니 갑골문의 사람들의 어투가 떠오른다. 그 딱딱하고 두꺼운 거북 등껍질에 싣는 정성은 정인이라야 단박에 알아챌 속살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수히 말로 상형하고 새겨두고 싶던 그 말이 오늘에라도 다를 바 있겠던가. 깊이 껴안아 내 여인의 찰진 움집에 살 것을 박아두면 세상 무엇이 두렵고 부럽겠는가. 거기엔 쾌감의 언어에 앞서 저윽한 안심이 있다. 하루 동안의 온 생애 동안의 긴장을 다 부셔버리는 뿌리까지 뭉청 뽑혀도 좋아라.

감기에 걸리면 왜 콧물부터 나오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왜 목이 콱 막히고 숨 쉴 수 없도록 가슴이 먹먹하고 오르내리는 신열에 밤을 꼬박 새게 되던가. 감기가 제풀에 내켜 씻겨 가기 전까진 먹지도 말하지도 말고 온 몸, 온 마음의 전폭을 마저 다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무수한 몸의 감기로 연습하여도 마음의 감기에는 면역도 없다. 어디에서 한 생애에 미처 알지도 만나지도 못한 정인이 날 그려 목 놓아 울고 있는지 그대는 어떻게 아는가. 그럼 만난 적도 안은 적도 없는 그 사람은 진정 없던가. 갑골에 새긴 일심전신. 그것이 갑(甲)의 정경이다. 바람이 부느냐 비야 니가 오더냐 세상이 풍경처럼 흘러가도 오로지 한 청청 소나무 코흘리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