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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넘어서야 명주옷 입은 '선비'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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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넘어서야 명주옷 입은 '선비' 윤선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2630)]

[글로벌이코노믹=김영조기자] “나는 50이 넘어서야 명주옷이나 모시옷을 처음 입었는데, 시골 있을 때 네가 명주옷을 입은 것을 보고 몹시 불쾌했었다. 대체로 이 두 종류의 옷은 대부(大夫, 종1품에서 종4품까지 벼슬한 이를 일컫는다)가 입는 옷으로서 대부(大夫)들도 입지 않은 이가 많은데, 더구나 평민으로서 대부(大夫)의 옷을 입어서야 되겠느냐? 이런 복식(服飾)은 모름지기 물리쳐 가까이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도록 하여라.”

▲ 고산 윤선도 선생이 유배지에서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 고산 4대손이 "충헌공가훈"이라는 표지를 붙였다.
위 글은 충헌공 고산 윤선도 선생이 아들에게 내려준 가훈의 일부입니다. 50이 넘어서야 명주옷을 입었다니 선생의 성품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익히 잘 알려졌으며,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 문인이지요. 하지만, 고산 선생은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배 이이첨 따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고, 서인 우두머리 송시열에 맞섰다가 또다시 유배되었습니다. 이렇게 20년 동안의 유배생활이 이어졌지만 선생은 봉림대군(鳳林大君 : 孝宗)ㆍ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다산 선생처럼 뛰어난 글들을 많이 남겼지요.

선생의 검소한 성품은 가훈 가운데 잘 드러나는데 “의복이나 안장이나 말(馬) 등 몸을 치장하는 모든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야 한다. 음식이란 배를 채우는 것으로 족하고, 의복이란 몸을 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말(馬)이란 걸음을 대신하는 정도로 만족해야하고 안장은 견고한 정도로 만족해야 하며, 모든 기구는 필요한 데에 알맞도록 써야 한다.” 라며 후손들에게 철저하게 검소한 삶을 살 것을 요구했습니다. 선생의 위대한 점은 자신과 후손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이나 심지어 집안의 노비에게 조차 덕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