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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겔 제작에 동참할 이 거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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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겔 제작에 동참할 이 거기 없어요?

[홍성훈의 오르겔이야기(13)]마이스터의 제자

[글로벌이코노믹=홍성훈 오르겔 바우 마이스터] 한국에 온 지 만 13년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에게는 제자가 없다.

사실 그동안 10여명 정도 작업실을 거쳐갔다. 짧게는 3주, 길어야 1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뼈를 묻겠습니다!”며 각오하고 시작한 사람도 있긴 하였다. 그러고는 한 달도 안 되어 소리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대체적으로 추석 때가 지나면 여지없이 ‘마이스터님!’하고 부른다. 나는 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처음에는 이해도 안 되고 상실감도 컸지만 이제 웬만한 것에는 무덤덤하다. ‘오르겔 바우’가 단지 이름으로 폼 나고 멋들어진 일이라고만 생각하다 배움과정에 시간이 걸리고 인내해야 하는 작업임을 알고 포기하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귀국한 후 제자를 제대로 육성해보자는 생각에서 독일처럼 3년이라는 긴 여정의 견습 기간은 아니어도 1년의 커리큘럼을 만들어 실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욕과는 상관없이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한국의 젊은 청년들 가운데 제자로 삼고 키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는 몰랐다.

손으로 하는 직업을 선호하는 유럽의 청년들과 한국의 젊은 세대들의 생각이 문화의 차이는 있어도 앞으로의 비전과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이 크게 다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 않은 것을 한참 후에나 알았다.
이 오르겔 제작의 세계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기에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어 여기저기 학교나 기관 등 목공예를 다루는 곳이라면 나름 찾아가 학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목수로서의 길을 가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혹여, 이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아무도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용기있게 나서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본다.

연습 없이 무대 위에서 실행되는 단 한 번의 인생을 연기해야 하는 그들을 한편으로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한국에서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거의 모두가 무모한 모험이요,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으므로.

아무도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고 개척하고 싶었다.

오르겔은 인간의 생체와 매우 흡사하다. 그만큼 오르겔을 제작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재료가 필요하고 다양한 부품이 있어야 하고 각 오르겔마다 작품의 성격이 달라 그때마다 새로운 부품이나 재료는 스스로 창작해서 만들어내야만 한다.

독일에서 작업을 할 때에는 모든 재료와 오르겔 바우어들이 있어 아무 어려움 없이 제작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철가공, 메커니즘의 장치들, 목재, 전기, 디자인, 세공 등 지난 10여 년 동안 황학동을 위시해서 구로, 영등포, 을지로, 청계천, 인천을 이 잡듯이 뒤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설득시켜가며 하나하나씩 만들어나갔다.

이제 40% 가까이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 오르겔을 자체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유럽에서 지난 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현재의 오르겔 제작을 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기적에 가깝지 않을 수 없다. 지금 17번째의 오르겔을 제작하고 있는 중이다.

음악, 철, 수학, 예술 등 모든 문화의 중심지였던 비잔틴에서 시작된 오르겔 제작 문화는 로마를 거쳐 유럽의 전역으로 흩어져 발전되어오다 이제 다시 아시아로 넘어오는 과정에 있다.

오르겔 제작은 재료나 테크닉 등 그 작동장치나 물리, 수학, 역학 등과 더불어 철, 목공예, 음악 등이 총 결집된 문화로서 그 국가의 근간산업이 이루어졌었던 유럽에서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거기에 바하 헨델 등의 세기적 작곡가들이 합세하면서 오르겔은 음악의 발전뿐만 아니라 문화의 풍요를 창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오르겔 문화가 아시아로의 회귀로 돌아오고 있다. 그 시작의 중심에 한국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한국에 건너오게 되는 외국의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토착화시켜왔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문화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그저 몇몇 관심 있는 귀족문화로 전락하다 어느 순간 없어지는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 역사가운데 ‘오르겔’이라는 문화가 없이도 잘 살아(?)오긴 하였지만, 한국 땅에서 또 하나의 문화적 신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요사이 한국에는 멘토적 강연이 많다.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비전’과 ‘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요즈음 대다수의 강연과 토론회에서 비전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빠짐없이 ‘블루오션’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고난이나 역경에 얽매이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고 시작한 일이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불행한 삶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기에는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고 비전을 쉽게 포기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딱히 해 줄 말은 없다. 단지 이 경험을 빗대어 새로운 일을 맨 먼저 본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보이지 않는 비전을 제시할 뿐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쟁취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아무도 접하지 못했던 이 외로움의 길을 같이 동행할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유독 생각난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 /훗날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얘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