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백로 즈음부터 거둬들이기 시작해 모아 놓은 하얀 목화로 어른들의 새 이불도 만들고, 나이가 찬 딸의 혼수이불도 장만해야 하지요. 목화는 두 번 꽃을 피웁니다. 여름철에 꽃을 피웠다가 가을에 접어들면 꽃이 피었던 자리에 다시 하얀 솜꽃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한여름 뜨거웠던 양기를 가득 머금고 다시 피어나는 이 꽃은 자신은 몸은 삐쩍 말라 가면서도 남은 기운을 모두 바쳐 피워낸 것이지요. 예전 춥고 배고픈 백성에게 모진 겨울을 나게 해 주었던 고마운 꽃이기에 "꽃은 목화가 제일이다."라는 속담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 소설이 되면 목화솜으로 새이불을 만든다(양주목화잔치에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조선 초 원나라에서 목화 씨앗을 가져온 문익점은 도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흔히 붓두껍에 목화 씨 여섯 알을 홈쳐 가져왔다고 알지만 당시 상황이 기록된 그 어떤 문헌에도 문익점이 도둑질 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조선 《태조실록》 7년(1398) 6월 13일 기록에는 “문익점은 계품사인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그 씨 십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또 《고려사》에도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라고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당시 목화는 금수품목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미 문익점 선생은 목화씨를 가져와서 온 백성이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한 점만으로도 영웅인데 도둑으로 몰고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영웅시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 있는 사람들은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