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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 빠진 닭' 현대 '포니' 폭발적 인기 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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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 빠진 닭' 현대 '포니' 폭발적 인기 끌다

새롭게 보는 한국경제 거목 정주영(1915~2001)] ⑰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멋지게 해치운 정주영은 또 하나의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 수리가 아니고 번듯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자동차산업이야말로 현대산업의 꽃이자 국력의 잣대이다. 또 다른 산업과 달리 철강・기계・전기・전자・화학・섬유 등 2만 여개의 부품을 각기 다른 생산공정을 거쳐 생산하고 그것들을 조립해서 완성하는 종합산업이 아니던가?

더구나 정주영은 처음 사업을 자동차로 시작했었기에 자동차산업의 완성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 중의 산업이라는 자동차산업이라는 것이 어디 꿈만 가지고 될 일이랴. 그 나라 최대의 자본과 최고의 기술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는 미국・일본・서유럽 등 선진국들의 전유물로 인식하던 때였다. 19664월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가 한국 진출을 위해 시장 조사와 함께 합작 법인 설립을 위해 타진했다.
하지만, 그들이 서울에 왔을 때 단순한 건설업체로 인식되던 현대는 접촉 대상자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그 무렵 신진공업사는 정부 도움으로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해 코로나를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조립해 내고 있었다. 정주영은 단양시멘트 확장 공사를 위한 차관 교섭을 위해 미국에 가있던 아우 정인영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차관보다도 급한 건 당장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고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명령을 받은 정인영은 당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형의 성격에 이력이 났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해보기나 했어?” 당연한 정주영의 대꾸였다. 이 말은 그 뒤 정주영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정인영은 당장 포드와의 접촉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데 정주영이 원래 유능한 자동차 수리 기술자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워 포드를 설득했다. 다행히 그 설득 덕분에 현대는 협력사 후보 명단에 끼어들 수 있었고 그해 12월 정주영은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뚝딱 설립했다. 포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제휴 대상기업들의 자본력과 신용도를 먼저 조사하기 시작했다. 주한 미대사관은 물론 미국 정보기관, 미국 언론기관, 주한 미국 금융기관 등 16개 기관이 동원되어 샅샅이 훑었다. 이 조사에서 현대건설의 신용도에 최고경영자 정주영의 사업에 대한 열의가 더해진 현대는 조사대상 업체 가운데 1위로 올랐다. 그러나 이 조사의 으뜸이 곧장 기술 계약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2월 포드의 국제 담당 부사장 일행이 정주영을 면담하러 왔다. 일종의 면접시험이었다. 그러나 사흘을 예정하고 시작했던 면접시험은 단 두시간만에 끝이 났다. 자동차 엔진구조에서부터 변속장치, 제동장치, 1만여 개 부품의 이름들을 거침없이 얘기하는 것은 물론 직접 운전을 해가며 정성을 쏟는 그에게 포드 사람들은 더 이상 검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한 이튿날에 현대와 포드는 21(국산 부품)79(미국산 부품)로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세간의 예상을 뒤엎은 정주영의 자동차사업 진출은 우리나라 경제계의 일대 충격이었다.

당시 정주영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매달려 자동차 사업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지만, 울산에 공장을 지었다. 3년은 걸려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포드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버리고 만 1년 만에 코티나를 조립해 생산, 시판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상일은 내 맘 같지 않은 법. 시장에 나온 코티나 승용차는 툭하면 말썽을 부렸고, 곳곳에서 코티나 구입자들과 다툼이 벌어졌다. 이 탓에 버스나 트럭도 잘 팔리지 않는 건 물론이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코티나를 코피나고치나골치나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코티나 택시 100대가 한꺼번에 경적 시위를 벌이면서 자동차를 반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험이 없는 상태로 만든 코티나는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던 차들은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자동차가 비포장도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한 포드의 코티나를 선택한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또 최초로 실시했던 할부제도에 따른 부실채권의 양산, 애프터서비스의 부실, 석유파동에 따른 경기침체, 마케팅 전략 미숙에다가 경쟁업체인 신진자동차의 방해공작까지 더해진 까닭도 있었다.

미국에 가 있던 아우 인영에게 새 미션을 줬다. 포드와 자동차 조립기술계약을 맺고 오라는 것. 포드의 리스트엔 현대자동차는 없었다. 그러나 포드는 정주영과 면담 두 시간만에 "OK" 사인을 줬다. 코티나는 툭하면 사고를 쳤다. 참혹한 실패로 하루하루 부도 막기에 급급했다. 또 한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도요타에 밀려 한국진출에 실패한 미쓰비시와 손잡고 엔진 개발. 197410월 한국 최초의 독자 자동차 '포니'가 첫선. 정주영은 '꽁지빠진 닭' 같은 디자인을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 대박이었다. 정주영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 진출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이었다. 꿈은 이루어질까?

그것뿐이 아니었다. 19696월 울산에 물난리가 나서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자 조립이 끝난 현대자동차의 차들도 물에 둥둥 떠다녔다. 이것이 소문을 타자 현대자동차가 물에 빠진 자동차를 판다.”라는 풍문이 돌았다. 그러니 이미 차를 산 사람들도 혹시 물에 빠졌던 차를 산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남은 할부 값을 내지 않겠다고 우기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렇게 첫 차의 출시가 참혹한 실패로 나타나자 이는 곧바로 경영압박으로 다가왔다. 월급이 몇 달씩 밀리는 건 예사였고 임원들은 날마다 발바닥이 닳도록 돈을 꾸러 다니느라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 하루하루 부도를 막아내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그러니 세금을 못 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전국 최고 체납자로 신문에 발표되기도 했다. 경쟁사 사장이 공개석상에서 현대차를 인수하겠다며 큰소리치는 일도 벌어졌다. 게다가 포드와의 사이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정주영의 야심은 좋은 소형차를 만들어 포드의 판매망을 통해 온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처럼 현대자동차가 포드의 하청공장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포드는 그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더구나 포드는 팔리지도 않은 자동차 판매대금으로 100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결국 1973년 정주영은 포드와 잡은 손을 놓고 한국 지형과 실정에 맞는 소형차를 손수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회사 내에서부터 반발은 무척이나 거셌다.

반대 논리는 자기자본금의 20~30배나 되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을 어디에서 빌릴 것인가?”돈을 빌릴 수 있다 치더라도 언제 세계 시장에 차를 팔아 수익을 챙겨 그 돈을 갚을 수 있을까?” 등이었다.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인 반발도 있었다. “최소한 5만대는 팔아야 하는데, 1972년 국내 자동차 판매대수는 승용차와 버스와 트럭을 다 합해 봐야 겨우 18000대를 넘길 정도다. 이 가운데 현대는 4000여 대에 지나지 않는다. 수출하기 전에는 내수로 버텨야 하는데, 이 정도 밖에 안 돼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정주영은 아니었다. 그는 먼저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엔진을 만드는 회사인 일본의 미쓰비시와 손을 잡았다. 미쓰비시는 신진자동차와 합작하려 했다가 경쟁업체인 도요타에 밀려 한국 진출을 하지 못했던 회사였다. 더 나가 1973년에는 영국 퍼킨스엔진과 디젤 엔진 기술 계약을 맺었고, 이탈리아 이탈디자인과는 차량 설계, 일본 미쓰비시와는 가솔린 엔진과 변속기 기술 계약을 맺었다. 드디어 현대자동차는 독자 생산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410월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자동차 제1호인 포니가 출시됐다.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자체모델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염을 토했다. 4기통 123980마력의 미쓰비시 새턴 엔진을 단 포니는 에너지 파동을 겪은 뒤여서 연료 절감에 중점을 두어 설계한 모델이었다. 정주영은 포니의 디자인이 꼭 꽁지 빠진 닭 같다면서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그러나 포니는 출시 전부터 62개 나라 228개 상사에서 수입을 희망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판매가격이 228만 원이었던 포니는 판매 첫해인 76년 무려 1726대를 내수로 팔아 6916대를 판 경쟁사인 기아 브리사를 제치고 단숨에 국내 시장 점유율 43.6%를 달성했다.

그러나 정주영의 꿈은 여기서 그칠 줄 몰랐다. 그는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 미국에 진출하고 싶었다. 그것도 당시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가 탄생한 것처럼 당당한 진출을 말이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계속)

/글 김영조 기자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