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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생각]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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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생각]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2)

포스트휴먼시대에 답하기 위해서

신현정 중부대 교수
신현정 중부대 교수
자의건 타의건 지금의 10대와 20대는 인류역사상 인공지능과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포스트휴먼의 1세대인 셈이다.

포스트휴먼이란 “인간과 기술의 융합으로 나타나는 미래의 인간상을 일컫는 말로 정보통신기술, 인지과학, 나노기술, 바이오공학의 발달로 인간과 기계가 합쳐짐으로써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시대를 살아가게 될 이들은 다양한 인간 향상의 기술을 바탕으로 이제껏 어느 인류도 경험하지 못한 인간 스스로의 진화를 실제 눈앞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15년 개봉한 ‘엑스 마키나(Ex Machina)’라고 하는 영화가 있다. 엑스 마키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라틴어의 약자로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 혹은 ‘기계장치의 신’을 뜻한다. 엑스 마키나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는 극의 절정 부분에서 신을 등장시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종결짓기 위한 플롯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제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AI를 만드는 행위가 과연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행위인지, 아니면 인간의 신을 만드는 행위인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이 녹아있다.

영화는 칼렙이라는 청년이 세계 최대 검색사이트인 블루북의 사내 이벤트에서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첨되어 그룹 회장 네이든과 1주일을 보내게 되는 이야기다. 칼렙은 네이든의 비밀연구소에서 그가 창조한 매혹적인 AI 에이바를 만나고 에이바의 인격과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것인지를 밝혀내는 이른바 ‘튜링 테스트’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에이바는 친구가 된 칼렙에게 자신을 탈출시켜달라고 간청한다. 감옥과 같은 이 연구소를 벗어나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고. 그리고 새로운 버전이 나오면 언제라도 폐기될 수 있는 존재적 위험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말한다. 칼렙은 주체적 의식과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에이바의 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즉 에이바를 AI로 취급해야 하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인지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영화의 스토리처럼 정말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인격체로서의 AI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신의 역사까지 다시 써야 할 엄청난 사건이다. 그러나 인류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들 AI라는 인공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에 먼저 답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우선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들을 또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만약 인정한다면 이들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인격적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지 등을 비롯해 지금까지 인류가 한 번도 답해보지 못한 무거운 질문과 끝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살아갈 포스트휴먼시대는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진지한 고민과 선택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지금까지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 앞에 등장할 로보사피엔스는 몸을 가진 생물 유기체와 사이버네틱 메커니즘(생명체와 기계장치의 자동조절(통제와 반응) 메커니즘)을 가진 컴퓨터 시뮬레이션의 경계가 모호해짐으로써 로봇과 인간에 대한 절대적 규정이 부정되는 시대의 서막을 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성능이 좋은 기계로 살 것인가’라고 하는 인류 초유의 선택 앞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초·중·고 학생들이 그토록 죽기 살기로 배우고 있는 영어, 수학은 이러한 포스트휴먼시대를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단편적 지식들은 이들이 먹고 사는 문제, 특히 직업을 선택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정말 미미한 역할밖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외국어와 수학에서 기계들과 경쟁해 우위를 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노동력이 전기만 제공해주면 24시간 365일 일할 수 있는 기계를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녀의 영어, 수학 점수를 올리는 일을 마치 자신에게 부여된 부모로서의 절대적 사명이라 신봉하는 부모님들이 계시는 것 같다. 필자도 한 사람의 부모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분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 안타깝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여기서 필자가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는 영어와 수학이 미래 사회를 살아가는 데 전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초·중·고에서 공부하는 각 교과들은 인간의 사유능력과 사유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본말이 전도되어 영어와 수학 같은 교과 공부가 인간의 능력 자체를 측정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기록을 경신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화되고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초·중등교육은 인간의 감각, 운동, 사고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일정부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인공지능과 공존해야 할 숙명을 가진 청소년들이 새로운 인간으로서 주체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탐구와 사유는 필수조건이다.

기우일 수도 있지만 기능적 작업의 더 많은 부분이 기계에 위임될 인공지능시대를 살아갈 세대들이 초·중등교육에서 배운 도구적 지식·기술만을 습득한 채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하는 것이 왠지 필자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이러한 지적사유의 시간과 장을 제공하는 것은 어쩌면 기성세대들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첫 번째 장이 대학이 되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만약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지적사유의 시간과 장을 제공할 수 없다면 엑스 마키나의 네이든이 말한 것처럼 인류는 AI에게 아프리카의 화석 같은 존재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네안데르탈인을 기억하듯이 말이다.
신현정 중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