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51)] 사벌국(沙伐國)의 역사

공유
0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51)] 사벌국(沙伐國)의 역사

글로벌이코노믹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기다'를 연재합니다.

한류문화인진흥재단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김경상 작가는 1990년부터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세계 100여곳을 방문해 지난 25년 간 세계문화유산을 카메라에 담아왔으며, 최근에는 한민족의 시원을 밝히기 위해 한·중·일에 흩어져 있는 단군의 흔적을 답사했습니다. 앞서 연재한 '고조선 시대 단군 이야기'에 이어 '한반도 삼한시대 이야기'를 김경상 작가에 의해 생생한 유적과 유물 사진으로 만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청리고분 4호지석묘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간돌칼, 상주박물관
청리고분 4호지석묘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간돌칼, 상주박물관


경북 상주 지역은 신상리 구석기 유적의 조사에서 밝혀졌듯이 태고적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청리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삼한 시대에 호로국(戶路國)이 함창읍 일대에 존재했다.


호로국은 진한에 속했는데 진한은 변한과 함께 마한의 지배하에 있어서 각 진한의 소국들로 마한에서 태수(太守)가 파견되었다. 나중에 진한이 경주의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독립을 하자 상주시내를 중심으로 사벌국이 진한연맹 소속으로 들어서 상주일대의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 뒤 마한은 서기 9년에 백제에 국권을 박탈당함으로써 멸망했고 서기 63년에 백제가 마한의 잔당을 소탕하면서 낭자곡(娘子谷城)까지 진출하자 진한연맹은 사벌국의 서쪽 경계인 구양(狗壤), 와산(蛙山)에서 백제와 접속했고 이듬해에 진한에 귀순한 복암성(覆巖城)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사로국 중심의 진한과 백제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백제는 계속해서 구양과 와산을 공격해서 점령하기까지 했지만 번번이 사로국에 패퇴하였다. 다루왕 때 시작된 전쟁은 기루왕 때에 간신히 진정되었고 사벌국은 사로국의 강력한 군사적 통제하에 놓였다. 사로국, 즉 신라는 마한을 패망시켜 일찌감치 거대한 영토를 지닌 영역국가로 발전한 백제와는 달리 본국 자체는 탈해 이사금 후반에 울산, 부산일대를 시작으로 주변국을 정복하기 시작할 때까지 비록 일개 소국상태에 불과했지만 진한 제국(諸國)을 사실상 자국 영토처럼 강력히 통제하며 지배하고 있었고 사벌국은 사실상 신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신라는 1세기 후반에 부산, 울산으로 진출하며 가야와 항쟁하고 서기 2세기 초반에는 실직국 등 동해안 일대를 공략하며 본국(本國)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진한제국을 강력히 결속하며 사벌국을 발판으로 백두대간 이북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아달라왕 3년인 156년에는 계립령(鷄立嶺), 아달라 왕 5년인 158년에는 죽령(竹嶺)길이 개통되자 진한의 세력권은 충북과 강원도 일대까지 뻗치게 되었다.


사벌국은 신라의 대 백제 병참기지로서 군사적인 지배를 받고 거기다 서쪽 영역이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시달림을 받자 불만이 누적되었는데다 나중에는 진한 소속의 소국들까지 신라에 지속적으로 합병되자 위기감을 느끼고 독립을 꾀하였다. 249년 첨해 이사금 1년에 사벌국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석우로를 파견했고 사벌국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