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철학을 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소크라테스나, 예수, 부처와 같은 철학자의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오히려 도달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같은 일반인의 사유가 철학자의 사유에 비해 의미가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삶에 대한 사유, 즉 철학은 우리 삶 전체에 투사되는 우리의 자화상임과 동시에 우리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철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관한 방법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철학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지혜가 삶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가 철학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소중한 삶을 사랑하는 첫 번째 사유방식, 그것은 고민하는 것이다. 혹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는지 자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혹자는 삶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찾는데 열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학문적 의미가 아닌 개인적 의미에서의 철학은 진리를 찾는 사유라기보다는 나는 누구이고 나에게 있어서 세상은 어떤 의미이며 구체적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아가는 삶의 행위이다. 삶을 사랑하는 그 두 번째 사유방식은 의심하는 것이다. 내 앞에 존재하는 삶의 모든 것들을 낯설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통념과 상식이 지배하는 삶은 아무리 잘 살았다하더라도 허무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형의 집에 갇힌 인형 같은 삶일 테니까. 아무리 자신의 행복을 의심치 않았던 인형이라 해도 언젠가는 자신이 관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마치 자신의 삶이 TV쇼 프로그램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 삶을 축복과 진실이라고 믿었던 트루먼이 진실과 마주한 순간, 삶 전체가 거짓으로 변해버린 영화 ‘트루먼쇼(The Truman Show, 1998)’에서처럼….
셋째로 철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철학하는 삶은 우리를 타인의 삶에서 자신의 삶으로 이끌어 준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대학에 가고 싶다’는 청소년들의 욕망은 과연 진정한 욕망인가. 혹시 나를 둘러싼 타인들이 대학에 가는 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청소년들도 대학을 욕망하는 것은 아닌가. 무엇인가를 욕망할 때는 왜 그것을 욕망하는지, 그것이 진정한 나의 욕망이기는 한 것인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지만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기에 욕망에 대한 회의는 반드시 필요한 삶의 태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소비하는 기계로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소비하는 기계가 되지 못해 미친 듯이 안달하다 생을 마치는 처량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진정한 소망과 부질없는 욕망의 차이에 대해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규정했다. “평소에 아무리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해도 곧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이다. 예를 들면 돈, 권력, 여자 등이 그렇다. 내일 모레 죽는다면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반면에 죽음을 앞에 두고 더욱 더 간절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망이다.” 어쩌면 인간의 뇌에는 스스로 철학이라는 사유방식의 스위치를 ON하지 않으면, 진정한 소망을 욕망하기보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도록 조작된 자동조정장치가 탑재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인간이 철학적 사유라는 스위치를 오랫동안 켜지 않은 채, 타인의 욕망만을 욕망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될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진짜 욕망, 즉 진정한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완전히 망각하게 되기 쉽다. 결국, 철학의 시작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철학의 끝은 타인의 욕망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찾음으로써 성립되는 주체적 삶이다.
신현정 중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