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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주년 기획] 내수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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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주년 기획] 내수가 살아야 경제가 산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계란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계란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제공
[글로벌이코노믹 한지명 기자] #1.중학생 자녀를 둔 김모씨(45)는 고민에 빠졌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선물하려 했지만, 학교 측에서 ‘김영란법’을 이유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꽃집을 운영하는 이모씨(53)도 스승의 날에도 꽃 주문이 끊겨 울상을 지었다. 스승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꽃이 청탁으로 간주돼 전년 대비 매출이 35%나 감소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화훼업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 서울 여의도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정모씨(50)는 텅 빈 가게를 보고 있는 것이 너무 힘들다. 정씨의 식당은 제철 음식을 산지에서 직접 공수해 와 요리하기 때문에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그간 정씨는 단골 손님들 위주로 예약을 받아 음식을 준비했고 최고의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예약 손님은 눈에 띄게 줄었다. 정씨는 식당 문을 닫지 않으려면 재료의 질을 포기하고 저렴한 메뉴를 내놔야 할 것 같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수 침체로 장기화하고 있는 경기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기업뿐이 아니다. 외식산업이나 화훼업 등 소상공인들은 생계형 사업장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중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은 내수 침체에 또 한번 불씨를 당겼다. 글로벌이코노믹은 지난해 9월 28일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8개월이 지난 지금 경제 전반에서 일어난 그간의 변화를 살펴보고 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다.

전문가들은 이미 김영란법에 따른 변화는 충분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식음료 유통업계와 중소기업 등 각 업계가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하고 김영란법 이전에 비해 가격 거품을 없애는 등 업계 차원의 노력도 해왔다. 이에 따라 앞으로 경제 전반에서 내수 활성화 효과를 보기 위해선 정부가 업계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 성장 동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통업계, 합리적 가격대 늘어나… “채널 경쟁력 높이는 게 관건”
유통업계에서 가장 먼저 김영란법의 직격탄을 맞은 건 백화점업계다. 명절은 유통업계에서 대목으로 불렸지만, 지난 1월 설 기간 주요 백화점들의 매출은 처음으로 역신장했다. 업계 1위인 롯데백화점은 작년보다 소폭 증가했으나 0.4%에 그쳤다. 현대백화점은 작년 설에 비해 10.1% 감소했다. 신세계백화점과 갤러리아백화점 역시 3.8%, 2% 역신장했다.

대형마트의 5만원 이상 선물세트 판매량도 급속도로 줄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달 설 연휴 전 4주 동안 대형마트 3사를 중심으로 선물세트 판매동향을 조사한 결과 가공식품을 포함한 농식품 선물세트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8.8% 줄었다. 신선식품도 22.1%나 감소했다.

유통업계는 곧바로 가격의 문턱을 낮췄다. 롯데백화점 측은 “김영란법 시행 이후 와인 선물 수요가 줄면서 와인 매출이 꾸준히 감소했으나 5만원 이하 와인 매출은 올 1분기 7.2% 신장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해 상반기 55% 수준이었던 5만원 이하 와인 상품 비중을 올 상반기 65%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반면 저가 상품 위주로 판매해오던 온라인 쇼핑은 소비 트렌드에 맞춰 5만원 이하 상품을 중심으로 기획전을 운영하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11번가는 지난 설 기간 선물세트 거래액이 지난해 대비 17%가 증가했다. 그중 3만원 미만 저가형 판매 비중이 87%를 차지했다. 김주희 SK플래닛 11번가 사업부문 유닛장은 “실용성으로 무장한 가성비 높은 실속형 세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고 전했다.

한상만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는 김영란법 특수가 끝난 유통업계가 채널마다 경쟁력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분석했다. 한 교수는 “롯데, 신세계 등 대형 유통업계는 온·오프라인을 통합한 플랫폼으로 편의성을 높이고 있고, 온라인은 가격 경쟁을 바탕으로 한 맞춤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결국 누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다변화 시도하는 식품업계, 자구적 노력이 우선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저녁 모임이 줄어들자 식품업계는 혼술·혼밥족을 위한 가정간편식(HMR)을 연이어 선보였다. 가성비 높은 제품들도 잇따라 출시하면서 소비자들의 꽁꽁 닫힌 지갑 열기에 나선 모습이다.

대상 청정원 관계자는 “1인 가구 증가, HMR 시장 확대 등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식품업계 역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며 “최근 혼술, 홈술 트렌드로 안주 상품에 대한 소비자 수요가 자연스레 늘면서 안주 HMR 시장도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 HMR 시장 규모는 2010년 7700억원에서 지난해 2조3000억원으로 연평균 20% 이상 고속 성장했다. 즉석 섭취 식품의 비중이 59.3%로 가장 높았고 즉석 조리식품(34.9%), 신선 편의식품(5.7%) 순이다. 제품 분야도 점점 세분화하는 추세다. 올해 가정간편식 시장 규모는 3조원 이상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이에 국내 식품업계는 제조사별 R&D 기술을 바탕으로 맛과 전문성을 모두 충족시킨 차별화된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해 나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불경기에다 외식 비중이 감소하면서 가성비 트렌드에 적합한 제품들도 대거 선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주류 업계는 유흥시장 감소에 따라 가정용 상품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가성비에 집중했다. 늘어나는 수입 맥주에 대응하기 위한 돌파구다.

◇중기업계 “업계 변화 노력 충분히 봤다… 일자리 창출에 정부 지원 필요”
중소기업들은 새 정부 출범 이후 희망적인 분위기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위축된 소비 심리, 그에 따른 내수 침체를 해결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한다. ‘재벌 저격수’라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공정거래위원장에 내정됐고 중소기업청이 중소벤처기업부로 승격되는 등 중기업계에는 오랜만에 성장 동력이 가동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정희 중소기업학회장(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은 정부가 근로 환경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지원만 해준다면 생산성이 향상돼 업계 발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이 회장은 “중기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김영란법 같은 제도에 맞춰 변화하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새 메뉴를 개발하고 거품 부분은 제거하는 등 변화에 잘 따라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업계의 노력만으로 침체된 내수를 활성화시키기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업계가 그에 따른 변화를 만들어왔지만 내수 활성화에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업계의 노력에 따른 정부 지원이 절실한 이유다.

이 회장은 “정부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만들자고 한 만큼 좋은 인재들이 와야 한다”며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려면 일하고 싶은 일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경영진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정부는 그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는 등 근로환경을 향상시키는 데에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지명 기자 yolo@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