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구려 치하에서 혈구군(穴口郡)으로 개칭됐다. 고구려 말의 권신 연개소문을 배출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신라에 영토로 흡수됐다. 고려 태조 때 강화현(江華縣)으로 개칭되어 비로소 현재의 명칭이 정립됐다.
고려시대 왕이나 왕족이 유배를 자주 가던 곳이고 고려 전기 무역 거점 벽란도의 관문으로 번영을 누렸고, 여몽전쟁 시기에는 몽고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개경에서 천도하여 40년 간 정식 수도로 기능했다. 당시 이름이 강도(江都)다.
이때 고려는 강도에 궁궐을 지었다. 백성들을 총동원해 빨리 만들었고 내성‧중성‧외성을 만들었는데 개경 환도 후 모두 불타고 헐리게 되었다.
고려의 왕릉도 대한민국에서 2기가 존재한다. 고려 고종의 왕릉이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는데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고려 희종의 왕릉인 석릉도 초라하긴 마찬가지다. 무신정변 이후에 무신정권이 대대로 집권했다.
당시 강화의 인구가 10만명에 달해서 2017년 현재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개경 복귀 이후 반발한 삼별초가 이곳에서 거병했으나 이들은 곧 진도로 남하했다. 고려말 왜구들이 이곳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김경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