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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무덤, 부여 산직리지석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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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무덤, 부여 산직리지석묘(중)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171)]

부여 산직리 지석묘이미지 확대보기
부여 산직리 지석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40호인 부여 산직리 지석묘는 1991년과 1992년까지 2차례에 걸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산직리 지석묘의 축조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여겨지며, 현재 2기의 지석묘가 남아 있다. 이 지석묘의 전면(前面) 남측으로는 금강줄기인 석성천이 흐른다. 유적은 그로 인해 형성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전망좋은 구릉 끝의 남쪽 상면에 있다. 이 유적은 송국리 선사 유적(松菊里先史遺蹟)과 같은 구릉선상에 위치하여 그 문화적 연관성에서 중요시되어왔다.
지석묘는 대형의 덮개돌을 가지고 있으며 2기가 동서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동쪽 지석묘의 발굴전 상태는 표토 위로 3개의 굄돌과 덮개돌이 드러나 있고 지석묘 아래의 무덤방은 깊게 패여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4개의 받침돌을 갖춘 기반식 지석묘로 밝혀졌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580㎝, 너비 370㎝, 두께 130㎝이며, 평면모양은 끝이 둥근 삼각형이다. 덮개돌의 장축은 남북방향이다. 덮개돌 위의 작은 굼이 열지어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덮개돌을 다리 축조부재로 사용하기 위한 절석굼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런 인위적 파괴행위로 인해 덮개돌은 원상을 잃고 서쪽 굄돌에 기대어 있는 상태이다.

서쪽 굄돌의 크기는 높이 182㎝, 너비 86㎝, 두께 45㎝이다. 북쪽 굄돌의 크기는 높이 160㎝, 너비 68㎝, 두께 60㎝이며, 풍화암반층에 구덩이를 파고 점토와 풍화암반토를 혼입해 다져 세웠다. 동쪽 굄돌은 높이 263㎝, 너비 116㎝, 두께 64㎝이다.

동북쪽 굄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표토를 제거하자 노출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크기는 높이 45㎝, 너비 42㎝, 두께 74㎝이다. 서쪽 지석묘는 덮개돌이 현재 지표면에 그 상면만 드러나고 있고 하부구조는 지하에 묻혀 있어 확인하기는 어렵다.

남쪽에서 덮개돌의 아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구덩이가 패여져 있어 이미 무덤방이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덮개돌은 크기가 길이 690㎝, 너비 460㎝, 두께 110㎝이고 평면모양은 육각형이다. 장축은 동서방향이고, 덮개돌 위에도 역시 절석굼이 있다.

출토유물로는 표토와 교란층에서 출토된 것들로 지석묘와 직접 관련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산직리 지석묘 해석에 참고가 될만한 것들로서 망치돌·갈돌·돌도끼편·간석기·홈돌·숫돌편 등이 수습되었다.

김경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