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중심이 그리스로 넘어 오면서 목욕문화는 깊이를 더해 갑니다. 그리스인들은 목욕 후의 개운함을 즐기는 한편, 목욕을 과학이나 의술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목욕물의 온도 차를 연구하여 병 치료에 활용하였고, 피타고라스는 냉수욕이 황달이나 우울증에 좋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중목욕탕도 이 때 등장하는데, 아르키메데스는 대중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그 유명한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12세기 십자군 전쟁기간에 ‘하맘’이라 불리는 터키지방의 증기탕이 유럽에 유입되면서 다시 대중목욕탕이 부할 되었으나, 16세기에 패스트, 매독, 문둥병이 유럽을 강타하자 사람들은 모이는 장소를 기피하게 되고 아울러 목욕탕도 다시 자취를 감춥니다. 목욕문화가 사라진 유럽의 200년간을 후대 혹자는 ‘불결의 시대’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19세기부터 상·하수관이 정비되고 비누나 각종 위생 목욕용품도 등장하면서 대중욕탕이 활기를 되찾습니다. 거기에 샤워기나 다양한 욕조, 수도꼭지의 등장과 약제를 이용한 한증탕, 사우나, 하맘 등도 어우러지며 오늘날에 이르러 목욕문화가 최고의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목욕문화는 서양과 사뭇 다른 개념으로 출발합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3월상사(三月上巳 : 3월 들어 첫 뱀날) ‘계욕’의 날에 신맞이 굿을 벌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계욕’은 목욕을 말하는 것으로, 문헌상 가장 오래된 목욕기록입니다. 쉽게 풀이 해 보면, ‘삼월삼짇날 산속의 맑은 물에 몸을 깨끗이 씻어 신맞이에 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의 선조들은 목욕을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삼국시대의 ‘목욕재계’란 말도 사전적의미로는 「제사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몸을 깨끗이 하여 부정을 피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선조들은 목욕을 위생 개념보다 정신을 맑게 하는 종교적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참고로 기독교의 세례의식도 같은 개념으로 오래전에는 전신목욕을 하였지만 지금은 이마에 물을 묻히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종교적 행위는 아니더라도 신라시대에 죄수들에게 사악한 마음을 씻어내라고 ‘목욕 벌’을 준 것도, 목욕을 정신 수행의 수단으로 삼은 독특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며 목욕은 청결과 건강유지의 씻김으로 일상생활화 합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온천과 한증도 이 시기에 성행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에 전수된 한증탕은 자갈이나 진흙을 불로 달궈 그 위에 멍석을 깔고 땀을 내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불가마 한증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온천탕은 말 그대로 온천물을 이용한 욕탕으로 주로 왕이나 고관대작들의 ‘피접’으로 활용되었는데, 피접이란 사람이 병이 들어 약을 써도 효험이 없거나 병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을 때, 병 치료를 위해 특정 지역에서 요양 하는 것을 말합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 중심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습니다. 이는 곧 ‘억불숭유’ 정책으로 이어지며 종교적 목욕문화는 더욱 위축되고, 고려 때의 자유분방했던 각종 목욕도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남녀의 혼욕은 말할 것도 없고 알몸 노출목욕은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처벌받았습니다. 부득이 목욕을 할 경우 속옷을 입은 채로 씻어야했고, 전신 목욕 보다는 대야 등에 물을 받아 부분적으로 몸을 씻었습니다. 주로 씻는 곳은 얼굴과 발이며, 여성인 경우 부엌에서 뒷물과 머리감기를 하였습니다. 한 여름에는 선비들이 계곡을 찾아 발만 물에 담그는데 이를 ‘탁족’이라 합니다. 이 또한 피서철 부분목욕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 목욕은 양반들 사이에서나 체면상 유지되었지, 일반 백성들은 그다지 구애받지 않고 물가에서 전신목욕을 하였을 것입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유전적으로 피부병을 앓아서 온천으로 피접을 가곤 했는데, 대표적인 행차지역은 황해도 평산온천과 충청도 온양온천이었습니다. 병치레가 유독 심했던 세종대왕은 온천욕도 잦았지만, 여주의 도자기 가마를 개조하여 도자기 구울 때 나오는 열을 이용하여 ‘증욕치료’를 하였다고도 전해집니다.
한편, 조선시대 가장 슬픈 목욕의 기록을 빼 놓을 수 없겠지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전쟁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당시 그녀들을 ‘환향녀’라 하였는데, 막상 고향에 오자 청나라에서 몸을 더럽힌 여자라 하여 받아들이질 않았습니다. 때문에 상심한 많은 여성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사실이 인조 귀에 들어가고 인조는 특단의 교지를 내립니다. “한강, 소양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예성강, 대동강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으니 환향녀들은 그 강에서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씻고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법으로 다스리겠다.” 하지만 유교를 중시한 사대부들이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는 미지수고, 이후 몸 파는 여자를 가리켜 ‘화냥년’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1883년 인천이 개항되며 서양식 호텔과 일본 거주지에 현대식 목욕탕이 등장했고, 한국인이 이용하는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책에 편승하여 대도시 중심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 당시 우리나라 온천지가 개발되면서 여기에 일본식 온천탕을 접목하여 관광지로 활용되었습니다. 인천의 경우는 월미도에 바닷물을 끌어 들여 해수욕탕과 해수풀장을 만들고 주변에 각종 위락시설까지 곁들여 수도권 최고의 관광 목욕탕으로 명성을 구가하였습니다.
최근 유명 찜질방이라 하여 가 보았는데, 카페·식당·영화관·풀장·어린이 놀이터·쇼핑코너 까지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보고, 로마목욕탕이 떠올라 궁금해서 살펴 본 ‘목욕문화’입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