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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 배로 돌고 돌아 런던에 입성…김성집, 역도서 첫 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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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로, 배로 돌고 돌아 런던에 입성…김성집, 역도서 첫 동메달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대한민국의 첫 하계올림픽 참가기

2018 평창올림픽의 성화봉. 30년 만에 대한민국 땅에 도착한 성화봉이 통일과 화합의 무대를 연출하기를 기대해본다.이미지 확대보기
2018 평창올림픽의 성화봉. 30년 만에 대한민국 땅에 도착한 성화봉이 통일과 화합의 무대를 연출하기를 기대해본다.
1948년 6월 21일 오전 8시,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는 67명의 선수와 임원진을 태운 기차가 서울역을 빠져 나갑니다. 런던까지 가는 20일간 여정의 시발입니다. 차창 밖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잘 싸우고 돌아오라고 손을 흔들고 더러는 벅찬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보입니다.

군중의 모습이 뜸해지자 67명의 기차 칸도 숙연해지며 각자 나름의 생각에 잠깁니다. 수행단장 ‘정항범’ 역시 바로 전날, 이승만 박사의 덕수궁 환송 만찬회에서 한 말을 상기하며 살짝 눈시울을 붉힙니다. “우리들 2000만 동포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드리는 바이며, 또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체육정신을 발휘하여 우리 기술을 마음껏 펼쳐 우승기를 가지고 돌아 올 것을 맹서합니다. 그런데 북조선 우리 동포들 중에서 훌륭한 역량과 기술을 가지면서도, 이 영예로운 무대에 우리와 함께 참가치 못한 것을 천만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올림픽에 참가케 주야로 노력해 주신 과도정부 여러분과 미군정 당국에 파견단을 대표하여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다시금 맹서하노니 우리는 우리민족을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선수와 임원 단은 부산에 도착하여 배로 갈아타고 일본 후쿠오카를 거쳐 요코하마에 내린 후, 다시 중국 상해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상해에서 또 홍콩으로 가는 배를 타야했으며, 홍콩에서는 비행기로 무려 5일간에 걸쳐 방콕-캘커타-봄베이-카이로-로마-암스테르담-런던까지 힘든 비행기 여정을 치릅니다. 지난한 장도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돈’이었습니다. 여비가 빠듯했기에 기차로, 배로 돌고 돌아서 우여곡절 끝에 런던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 후 우리는 신생 독립국으로, 세계에 알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고, 그 일환으로 스포츠가 여러 면에서 효과적이라 판단합니다. 따라서 광복 그 해 1945년 몽양 여운형선생을 중심으로 ‘조선 체육회’가 부활되고, 이듬해 올림픽대책위원회를 따로 두어 런던 올림픽 참가 교섭을 타진합니다. 당시 대책위 부위원장으로 ‘전경무’씨를 발탁하였는데, 이 사람은 재미교포 출신으로 전 미국대학 웅변협회장을 지낼 정도로 영어에 능통했으며, 미주 ‘신한민보’ 운동부 기자로 활동하며 미국 내 스포츠관련 사람들과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시간대 동창인 ‘에브리 브런디지’가 미국올림픽위원장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부위원장이어서, 조선 체육회에서는 전경무씨를 내세워 브론디지를 설득하면 올림픽 참가가 가능하리라 낙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운형 회장의 친서와 협조문을 들고 미국에 간 전경무는 브론디지로부터 전혀 예상 밖의 말을 듣게 됩니다. ‘일본 식민지를 벗어났지만 신탁통치를 받고 있으므로 독립국가가 아니고, 또한 IOC에 가입되지도 않아 참가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난색을 표합니다. 이에 국내는 발칵 뒤집혔고, 전경무 부회장은 손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IOC 위원장과 관련 인사들을 만나 눈물겨운 설득을 합니다.


브론디지도 나름대로 힘을 보태 당시 극동사령관이며 미국 체육회 위원장을 겸임하던 맥아더 장군에게 저간의 사정을 피력하자, 맥아더는 흔쾌히 미군정 ‘하지’ 중장으로 하여금 조선의 올림픽 참가를 적극 지원해 주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이들의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1947년 3월 IOC로부터 ‘올림픽 출전 희망 종목들에 한해서 해당 국제경기연맹(IF)에 가입하고, 6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 참여하여 참가 의사를 밝히면 런던 대회가 가능할 것.’이라는 내용을 듣게 됩니다. 전경무는 즉시 국내로 들어와 이 사실을 알렸고, 5월에 IOC 가입신청서를 들고 스톡홀름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너무도 어이없이, 전경무를 태운 미국 수송기는 일본 후지 산 근처에서 추락하여 전경무 위원장을 포함하여 승객과 승무원 41명 전원이 사망합니다.

슬픔과 충격에 빠진 조선올림픽위원회(KOC)는 임시방편으로 미국 교포 ‘이원순’씨를 스톡홀름으로 보내 참가 의향서를 제출하고 마침내 IOC가입 승인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승인 당시 국가명은 ‘조선’이었으며, 영문으로는 ‘KOREA’이었습니다.

참가 확정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당장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충당할 길이 막연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유지로부터 지원금을 약속 받았지만 기대와는 한 참 못 미쳐서, 이에 조선체육회는 본격적으로 올림픽 후원회를 조직하여 올림픽 참가 기념우표와 올림픽 복권을 발행합니다. 특히 조선올림픽 후원회장 안재홍 명의의 복권은 액면가 100원짜리로 140만장이 발행되는데, 복권에 고인이 된 전경무씨의 사진을 넣어 그를 기리는 의미도 담았습니다. 당시 가장 비싼 담배가 300원이라 지금으로 환산하면, 복권 한 장이 약 1만2000원에 호가하는 큰돈이었지만 애국심이 앞서 예상외로 거의 다 팔렸습니다. 그러나 80여명의 파견인원을 목표로 모금한 후원금은 턱없이 모자라 결국 줄이고 줄여 67명이 적은 경비로 장도에 오르게 됩니다,

1948년 7월 29일, 선수단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런던 대회장에 들어옵니다. 출전 종목은 육상‧역도‧복싱‧레슬링‧사이클‧축구‧남자농구이며 52명의 선수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중 마라톤을 제외한 다른 종목은 올림픽경험이 없어서 내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역도를 필두로 예상 밖의 성과가 나왔습니다. 경기 첫 날부터 역도 밴텀급의 이규혁과 페더급의 남수일이 각각 4위를 차지하여 주목을 받더니, 이틀째 김성집 선수가 인상에서 122㎏500g을 들어 올려 동메달을 목에 겁니다. 이는 우리나라 올림픽 역사에 공식적인 첫 메달로 기록됩니다. 역도의 선전은 다른 선수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한국은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67명의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이미지 확대보기
한국은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처음으로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67명의 선수단이 입장하고 있다.

김성집이 동메달을 딴 지 이틀 후 복싱 플라이급에 출전한 한수안 선수도 체코 선수를 물리치고 동메달을 추가했습니다. 축구에서도 이변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경기를 멕시코와 갖게 되었는데, 현지 한 신문은 조선이 멕시코를 이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전반전 2대 1, 후반전 3대 2, 종합 5대 3의 조선 승리였습니다. 비록 다음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지긴 했지만, 이 후 멕시코 축구팀과 만날 때면 남다른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 기대했던 마라톤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최윤칠은 선두를 지키다가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도 포기해야 했고, 다른 선수들도 완주는 했으나 모두 20위권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조선은 총 13.75점을 받아 59개 참가국 중 24위를 차지합니다. 이는 동양에서는 금메달 한 개가 있는 인도 다음으로 좋은 성적이었습니다.

올림픽 사상 첫 출전에 놀라운 성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대에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36년간 나라를 빼앗겼던 한과 여전히 분단된 나라의 처지를 올림픽 경기를 통해 위로 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로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결과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진정한 스포츠 정신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의 고사 성어가 있습니다. 이를 온고수심(溫故修心)으로 고치면, ‘옛것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다.’가 되지 않을까요. 어떤 일이건 처음은 있기 마련이고, 처음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린다면 좋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2017년 오늘 우리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습니다. 70년 전 험난했던 첫 올림픽 출전 당시를 통해 평창 올림픽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