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논다는 것, 다시 말해 즐길 줄 안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치 않다. 풍류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생과 예술이 삼위일체가 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멋을 아는 벗들과 시와 음악으로 교감하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풍류도(風流道)라 할 수 있다.
“살구꽃이 필 때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막 피면 한 번 모인다.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서늘해지면 서지(西池)에서 연꽃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매화가 피어나면 또 한 번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장만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도록 한다.”
죽란시사(竹欄詩社)는 조선시대의 대 저술가이자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만든 시모임이다. 죽란(竹欄)이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를 가리킨다. 꽃 사랑이 남달랐던 다산 선생은 집 마당에 꽃과 나무를 가득 가꾸어 석류, 매화,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치자나무, 산다화, 금잔화, 은대화, 파초, 벽오동, 국화, 부용화 등이 철 따라 꽃을 피웠다. 혹시라도 심부름 하는 하인들의 옷자락에 스쳐 꽃이 다칠까 싶어 화단 둘레에 대 울타리(竹欄)를 쳐 놓았다. 그 대나무 울타리 두른 집에서 마음이 맞는 벗들과 꽃 필 때에 만나 한가로이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이 다름 아닌 ‘죽란시사’였다. 이 얼마나 멋진 모임인가.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그 꽃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은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꽃을 핑계로 만나 시를 짓고 술잔을 기울이며 흉금을 털어놓던 죽란시사는 다산의 각별한 꽃 사랑에서 비롯된 모임이었다. 여름에는 연지에 배를 띄워 연꽃이 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을엔 국화 앞에 촛불을 켜고 꽃 그림자가 그린 수묵화를 즐겼던 다산이었기에 그런 멋스런 모임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다산이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을 탐하거나 햇과일의 맛이나 보자고 모임을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매운 추위를 이기고 피어난 꽃에서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겨울나무가 잎과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보고자 하진 않았을까 싶다. 꽃 피는 시절에 맞추어 시회를 열고 화사한 꽃그늘에 앉아 마음 맞는 벗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일찍이 중국 명나라 때 문명이 높았던 원굉도는 자신의 저서 ‘원중랑전집’에 꽃을 감상하는 데에도 때와 장소가 있다고 했다. “겨울에 피는 꽃은 첫눈 올 때가 좋고, 눈이 내리다가 개거나 초승달이 뜰 때 따뜻한 방안에서 보아야 제 맛이 난다. 봄꽃은 개인 날, 약간 쌀쌀할 때 화려한 집에서 보는 게 좋고, 여름 꽃은 비 온 뒤 선들바람 불어올 때 좋은 나무그늘 아래나 대나무 그늘, 물가의 누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제격이다. 가을꽃은 시원한 달빛 저녁이나 석양 무렵, 텅 빈 섬돌, 또는 이끼 긴 길이거나, 깎아지른 바위 곁이 좋다. 만약 날씨를 따지지 않고 아름다운 장소를 가리지 않고 꽃을 본다면 신기(神氣)가 흩어지고 느슨해져서 서로 어울리지 못하니, 이는 술집에 있는 꽃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