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서체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몇 번이나 바뀌었다. 몇 번의 사화로 귀양 기간이 길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의 서체 자체는 숙련만 이해될 뿐 감동은 없었다.
이렇게 제주의 겨울 여행은 절간의 묵언수행과 같이 풍광과 함께 느긋하게 보내다 오는 것이 백미다. 그런데 구좌 5일장에서 돌연 삼천포를 타 버렸다. 설렁설렁 시장통을 돌아다니다 전 직장 동료 남승진(54)과 마주친 것이 그 시작이다. 그는 대구가 고향인데 설이나 추석 연휴때 고향 가는 길에 제주에 자주 들른다고 했다. 국수 한 그릇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이미 제주의 지역 전문가쯤 되는 이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권유로 제주의 명소가 된 풍림다방으로 갔다. 풍림은 원래 세화리의 해변가에 있었는데 자리 값이 올라 인적이 드문 중산간지역인 송당으로 왔다고 한다.
작고 아담했는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서울의 유명 치킨집도 옆으로 옮겨 와 한적한 마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번호표를 받고 40분을 기다려 안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커피맛이 맑고 부드러웠다. 그는 ‘건축학개론’이란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어느 카페와 비교하며 아무리 스토리텔링의 시대라지만 커피든 뭐든 먹는 장사는 역시 맛이 먼저 라고, 그래야 오래 간다고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질 때 그는 일산에 있는 유명한 수제빵집의 노하우를 전수받아 인생의 이모작을 여기에서 펼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관심사란 알고 보면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불현듯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살롱드탱자’의 주인장 지준호(48)가 궁금해졌다. 그는 6년 전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이곳에 정착했다. 듣기로 최근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고 해서 그 후일담이 궁금하기도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모두 운다면서? 정말 눈물이 나든가? 손님은 여전하고? ” 나는 짐짓 만나는 것은 다음으로 하고 싶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밝고 높은 억양으로 한꺼번에 바삐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며칠이나 방구석에 처박힌 목소리로 눈물은 커녕 발만 아팠다고 대꾸했다. 오히려 다녀온 뒤 자존감에 대한 책만 쌓아놓고 읽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날 늦도록 그가 전해 준 일등성 별자리, 시리우스의 전설을 추위에 떨며 들어야했다. 술 기운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으리라. 그는 경제적 안정은 얻었지만 사람들에게 다쳐 지친 듯 했다. 제주에 혼자 내려 와 6년 동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 그에게 사람이란 낮선 이방인, 시중 들 손님, 가깝고도 먼 경쟁자였을 것이다.
역발상이 어째서 내가 몸담은 광고계에서나 쓸 말이던가. 나는 그에게 이번엔 다시 서울로 거처를 옮겨 대학원이라도 다니며 같은 또래의 동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보고 새로운 인연이 찾아 올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내 제안에 감동한 듯 술잔을 들이키며 내 말이 인사이트가 있었다는 총평을 남겼다. 일이 이쯤되자 나는 남은 숙제를 마치기로 했다. 바리스타 김종대형(57)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대학 시절 광고동아리에서 만난 형은 차분과 광분의 분위기를 조석으로 넘나드는 열정적 화술로 우리를 사로 잡았었다. 10년전 쯤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로 이름을 떨치던 형에게 갑작스런 뇌경색이 찾아왔고 형은 미련없이 제주행을 결정했다. 그는 레드브라운이라는 카페를 하고 있었는데 올해 2월부터 동백꽃 군락지가 있는 위미항 옆으로 같은 이름의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형은 챙이 없는 헌팅캡이 잘 어울렸는데 원두라고 하기엔 너무 미안해서 연두라고 이름을 지어준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사온 변변치 않은 안주로 꽤 많은 술을 마셨다고 기억되는데 다음 날 내 안부전화에 “뭘 얼마나 마셨다고. 다음엔 명태찜에다 제대로 마시자”라고 했다. 형은 벚꽃 길위로 스쿠터를 타고 열시에 출근하는 그 곳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는데 그건 진짜인 것 같았다.
김시래(정보경영학박사, 생각의돌파력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