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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과 시장 삼국시대에 등장…5일장은 물건 거래하는 교역장이자 정보 소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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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과 시장 삼국시대에 등장…5일장은 물건 거래하는 교역장이자 정보 소통의 장

[홍남일의 한국문화 이야기] 상거래 변천사

상거래란 ‘이익을 얻기 위해 물건을 팔고 사는 행위’입니다. 상거래에서 ‘상(商)’은 한자풀이로 ‘장사 商’입니다만, 본래 이 商자의 어원은 3000년 전 중국 상나라(은나라라고도 함)에서 시작됩니다.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는데, 그로 인해 상나라의 많은 관료와 기득권층들은 정계진출이 막히고 생계조차 막막해집니다. 결국 이들이 택한 수단은 장사였지요. 남보다 머리가 좋았던 이들은 장사에서 탁월한 솜씨를 보이며 부를 축적합니다. 그러자 ‘장사를 잘하는 상나라 사람’이란 말이 회자되고, 어느 때 부턴가 ‘상나라 商’이 차츰 ‘장사 商’으로 원뜻이 바뀝니다.
지금도 사용되는 상인, 상술, 상가, 상업 등의 말도 상나라의 ‘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의 거래 방법은 이 지역 저 지역 돌아다니며 물건을 교환하는, 소위 말해 ‘행상’이었습니다. 이런 행상은 훗날 화폐 등장으로 교환수단에 변화가 있긴 하지만, 수천 년 지난 오늘날까지도 방식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부족국가들에서도 행상의 흔적은 많이 발견됩니다만, 문헌상으로는 고려사에 소개되고 있는 백제 노래 ‘정읍사’ 가사가 최초 같습니다. 정읍사는 전라도 정읍에 사는 아내가 행상 나간 남편의 밤길을 염려하는 애절한 노래이지요. 한 소절을 현대말로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달아 높이 떠서 행상하는 내 님의 밤길을 환히 비추어다오’입니다. 이렇듯 정읍사를 통해 우리는 삼국시대에 이미 행상이 일반적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5일장은 5일에 한 번씩 열려서 5일장으로 불린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보면 장이 서지 않는 날은 없다. 사진=한국관광공사이미지 확대보기
5일장은 5일에 한 번씩 열려서 5일장으로 불린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보면 장이 서지 않는 날은 없다. 사진=한국관광공사

가가호호 방문하는 행상과 함께 시장도 삼국시대에 등장합니다. 신라 소지왕(490년) 때 수도 경주에 ‘경시’가, 지방의 ‘향시’가 대표적입니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때는 벽란도에 다수의 집하 창고를 설치하여 외국과 무역거래를 하였으며, 상설시장은 물론 만두가게 같은 단일 상점도 개성 중심가에 자리 잡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 때 불교 사찰에서 상행위가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찰은 종교적 모임의 터이자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의 숙박 장소이기도 했지요. 해서 이들을 상대로 소금, 곡물 등의 생필품이 유통되었으며 심지어 술도 팔았습니다. 고려시대가 과거에 비해 훨씬 상거래가 활발한 데에는 적극적인 국가의 정책도 한 몫 했습니다. 특히 성종에서 숙종 대에 ‘건원중보’나 ‘해동통보’ 등 여러 화폐가 등장하는데 화폐유통 활성화를 위해서 상거래를 적극 장려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이런 상행위가 크게 위축됩니다.

성리학의 조선왕조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하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이전까지 활발했던 상업이 급격히 퇴보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생필품의 거래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농민이나 양반층은 물론 어느 누구라도 수공업 제품이나 소금·생선 등 생활에 요긴한 물품들을 누군가에게 공급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국가에서는 한양 등 주요 도시에 ‘시전’을 설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습니다. 시전의 기능은 백성들에게 일상 생활용품을 공급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품을 사 들이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밖에 정부가 백성들로부터 받은 여러 공물 중 사용하고 남은 것이나, 중국에서 사신이 가지고 온 물건 중 일부를 판매하는 일도 겸하였습니다.

그러나 농어촌이나 도시로부터 떨어져 있는 지역은 시전이 없기 때문에 늘 공급부족을 겪어야 했고, 그나마 행상들이 공급책 역할을 해주었으나 수요에 부응하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름 하여 ‘농촌 장시’입니다.

농촌장시는 정부 주도가 아닌 백성들의 자발적 시장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필요한 것’과 바꾸어 생계를 꾸리는 물물교환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매매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민과 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였지요.

장시가 성행하자 기존의 행상들이 타격을 받습니다. 시골 농민들이 행상의 비싼 물건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어쩔 수 없이 행상들은 그들의 판매 방식을 바꿉니다. 이것은 이른바 ‘장돌뱅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장돌뱅이는 시골구석을 찾아다니기보다 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구해 장시를 돌아다니며 판매를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행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행상이 장돌뱅이로 전환되었습니다. 한편 장돌뱅이나 행상에게 가장 큰 취약점은 신변안전이었습니다. 한 장터에서 다른 장터로 이동시 떼강도를 만나 물건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해서 이동시 무리를 짓게 되고, 자연스럽게 조직을 갖춰 나갑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조직은 정부의 감시 대상이자 투명한 세수 확보원입니다. 당연히 조선정부도 조직화된 행상들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일명 ‘행장’이라는 통행증을 발급하고, 이들로부터 일정한 세금을 받습니다. 이후 국가공인의 행상들은 상단규모를 더욱 크게 하며 뒷날 ‘보부상’의 이름을 얻게 됩니다.

조상들은 음력을 기준으로 장날을 일육장(1일6일), 이팔장(2일8일), 오십장(5일10일) 등으로 설정하여, ‘송파 일육장’ ‘공릉 오십장’처럼 지역장시의 첫 날을 기준 삼았다. 사진은 제주 오일장.이미지 확대보기
조상들은 음력을 기준으로 장날을 일육장(1일6일), 이팔장(2일8일), 오십장(5일10일) 등으로 설정하여, ‘송파 일육장’ ‘공릉 오십장’처럼 지역장시의 첫 날을 기준 삼았다. 사진은 제주 오일장.

조선 중기 수차례의 변란을 겪으며 지역경제가 곤두박질하는데 오히려 장시는 더 많이 열립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 그 수효는 전국 1000여 곳에 이르고, 이로 말미암아 장시 상호간에 조정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장시 조정의 핵심은 장시의 개시일자 변경입니다. 쉽게 말해 ‘5일장’이 만들어진 겁니다. 5일에 한 번씩 열려서 5일장이지만, 열리지 않는 날 이웃 지역은 장이 서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보면 장이 서지 않는 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5일장 이었을까요. 이는 음력의 시간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음력은 한 달을 30일로 기준하기 때문에 단위를 5일 간격으로 두는 것이 편했습니다. 따라서 장날을 일육장(1일6일), 이팔장(2일8일), 오십장(5일10일) 등으로 설정하여, ‘송파 일육장’ ‘공릉 오십장’처럼 지역장시의 첫 날을 기준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에 맞추어 힘든 농사일에 모처럼 손을 놓는 휴일로 생각했습니다.

5일장은 다양한 물건을 거래하는 교역장이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닷새마다 한 번씩 장터에서 이웃 사람들을 만나 안부를 나누고, 장터마다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를 통해 최신 소식을 듣는 정보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장터는 사람의 왕래가 용이한 곳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됩니다. 서울근교에서는 강을 끼고 있는 행주나 파주에 장이 들어서고 지방에서는 읍성이나 성곽의 남문 주변에 장이 섰습니다.

5일장은 상거래 장소이자 동시에 볼거리·먹을거리·즐길거리가 어우러진 여흥의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지역 특산 요리도 맛 볼 수 있고, 뱀 쇼와 각설이 공연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정조 때 새롭게 등장한 ‘사상도고’ 상인들은 장터에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스스로 돈을 내서 놀이패를 고용하여 장터 흥을 돋우었습니다. 5일장을 통해 유명해져 오늘날 무형문화재의 명성을 얻고 있는 놀이로 송파장의 ‘송파 산대놀이’, 양주 다락원장의 ‘양주 별산대 놀이’, 안성장의 ‘안성 남사당패 놀이’ 등이 손꼽힙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

5일장 초기에는 허허벌판에 터를 잡았는데, 19세기 후반에 ‘장옥’이라 해서 장터에 가옥을 짓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장옥을 중심으로 시장이 활성화 되자 재래시장이라 할 수 있는 상설시장이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행상은 1톤 트럭을 발삼아 곳곳을 누빕니다.

오늘날 교통과 유통망의 발달로 대형 마트나 쇼핑센터가 생기면서 5일장과 재래시장은 물론 한복, 한약재 등 뚜렷한 특성을 자랑하던 시장들도 손님의 발길이 뜸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겠지만, 전통시장만의 ‘정겨운 문화’까지 메말라가는 것 같아 아쉬워 집니다.


홍남일 한·외국인친선문화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