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익산 호암리 기호암각화와 갑골문자

공유
1

익산 호암리 기호암각화와 갑골문자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318)]

익산 호암리 암각화이미지 확대보기
익산 호암리 암각화
중국 상고시대에 탕(湯)임금이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후 상(商)나라를 세웠다. 상나라는 반경(盤庚)임금에 이르러 도읍을 은(殷)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273년이 지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은은 페허로 변하였다. 이곳을 사서(史書)에서는 은허(殷墟)라고 하는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일대이다. 갑골문은 바로 은허에서 발견된 상나라 후기의 복사(卜辭)를 기록한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문헌인 갑골편에 사용된 문자이다.

따라서 갑골문은 기원전 1300년쯤부터 기원전 1100년까지 사용된 문자이다. 그 당시에는 거북이의 껍데기나 짐승의 뼈를 불로 지져서 갈라진 흔적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습속이 있었다. 점을 친 날짜·점친 사람·점친 내용·점친 결과·결과에 대한 판단 등 일련의 사항을 점을 치는 데 사용한 거북이 껍데기나 짐승의 뼈 위에 칼로 새겨놓았다. 갑골문은 사용된 재료로 인하여 갑골문, 발견된 장소로 인하여 은허문자(殷墟文字), 내용으로 인하여 복사(卜辭), 서사방식으로 인하여 계문(契文)이라고도 부른다.
갑골편은 청(淸)나라 광서(光緖) 말년에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발견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용골(龍骨)'이라고 하여 한약재로 쓰였다. 1898년 톈진(天津)의 멍띵성(孟定生)과 왕샹(王襄)이 용골에 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고간(古簡, 고대 죽간처럼 문자가 새겨진 문헌이란 의미)'이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1899년 왕이룽(王懿榮)이 갑골편을 최초로 저록한 리우어(劉鶚)와 더불어 감정하고 연구한 결과 용골의 문자가 '은인도필문자(殷人刀筆文字, 은나라 사람이 칼로 새긴 문자)'임을 밝혀냈다. 이로써 갑골문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고대 역사는 물론 중국문자학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경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