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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호암리 기호암각화와 문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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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호암리 기호암각화와 문자의 역사

[김경상의 한반도 삼한시대를 가다(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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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호암리 암각화
문자의 기원은 BC 50000년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그 후 점차 흔해져 BC 10000년경에는 문명인이 흔히 사용하던 그림문자가 된다. 초기의 그림문자는 단지 기억을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으며,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사용된 것은 인류의 문명이 크게 발달한 중국·메소포타미아·이집트·마야 등의 문자를 들 수 있다. 문자가 아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는 매듭이나 막대, 조가비띠 등을 들 수 있다.

'그림 문자'에서 '표의 문자'로, 다시 '표음 문자'로 바뀌어 온 문자의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 문자의 여러 형태 중 한글, 영어의 알파벳, 일본의 가나와 같은 '표음 문자'가 가장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문자임을 설명하고 있어서, 한글의 과학성을 일깨어 준다. 문자가 존재하려면 문자를 사용하는 집단의 생각을 나타내는 기호가 있어야 하며 여러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야 한다.
최초의 문자는 농축산물의 수확량을 기록한 것이다. 설형문자는 여러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신에 대한 찬송, 고대의 예언, 문학자료 등의 보관을 가능하게 했다. 기호를 쓸 줄 아는 사람,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기호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이때까지 설형문자를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중동지역의 여러 부족국가들이 설형문자 체계를 도입하지 않았더라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의 역사적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뒤 비로소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설형문자가 발명되었다.


김경상 다큐멘터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