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칼럼] 이판사판 정치판

기사입력 : 2019-05-1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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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 일행이 송도를 지나고 있었다. 사신의 행렬은 언제나 구경거리였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중국 사신은 콧대를 있는 대로 높이며 구경꾼을 내려다봤다. 그 눈에 난데없이 계집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사신은 흠칫 놀랐다. 안내하던 조선 관리에게 털어놨다. “귀국에 천하의 절색이 있구나. 오늘 내가 그를 보았노라.”

중국 사신이 봤다는 계집아이는 훗날 ‘송도 기생’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황진이(黃眞伊)였다. 황진이는 이 정도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어려서부터 남성을 끌어당기는 특별한 매력이 넘쳤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이 소개한 일화다.

이랬던 황진이가 당대의 유학자를 유혹했다. 그러나 유학자는 넘어가지 않았다. 황진이는 “섬섬옥수로 유학자의 ‘급소’를 애무하며 꼬드기기도 했다.” 유학자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천하의 황진이도 정복할 수 없는 ‘남성’이었다.

황진이는 고결하기로 소문난 스님에게도 접근했다. 스님은 유학자와 달리 얼떨결에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파계승이 되어야 했다. 황진이 때문에 ‘땡초’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째서 유학자는 황진이 앞에서도 초연했는데 스님은 파계를 했을까. ‘숭유억불(崇儒抑佛)’ 사회에서는 그래야 바람직했다. 불교를 깎아내리는 게 당연했다. 반면, 유학자는 황진이의 유혹마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기품이 높아야 했다.

조선 초 유학자인 정도전(鄭道傳)은 스님을 ‘간민(姦民)’이라고 규정했다. ‘사농공상’에 속하지 않은 채 ‘놀고먹는 족속’이라며 미워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6가지 좀’에 스님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불교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절의 재산을 빼앗겼다. 승과(僧科)가 없어져서 공무원이 되는 길도 막혔다. 11개 종단이 세종대왕 때 2개로 축소되더니, 중종 임금 때에는 아예 없어져 버렸다.

연산군의 경우는 특히 심했다. 절을 기생 숙소로 만들었다. 스님을 강제로 환속시켜 사냥터의 몰이꾼으로 전락시켰다. 여승은 궁궐 노비로 삼았다.

그래도 불교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생긴 게 이판 스님(理判僧)과 사판 스님(事判僧)이었다. 이판 스님은 수행에만 전념하는 스님이었다. 사판 스님은 어려운 절의 살림을 책임지는 스님이었다. 이를테면 ‘경제 스님’이었다. ‘역할 분담’이었다.

스님이라면 누구나 속세를 멀리하는 이판 스님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탄압에도 버티기 위해서는 절의 살림을 꾸릴 스님도 필요했다. 그 역할을 맡은 게 사판 스님이었다. 사판 스님이 없었다면 이판 스님도 없었다.

이 이판 스님과 사판 스님에서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판+사판=이판사판’이다. 사전을 뒤져보면, 이판사판은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 어쩔 수 없게 된 판’이다.

요즘, 이판사판을 저절로 떠오르도록 하는 ‘판’은 무슨 판일까. 아마도 ‘정치판’이다. 국민 눈 밖에 나서 막판으로 몰린 정치판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이판사판을 곱씹으며 정신 좀 차려도 국민의 용서를 받기 어려울 판이다.


이정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slee@g-enews.com

이정선 기자(데스크) jslee@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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