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밭을 일군 사람(4) 한글 춤 안무가 이숙재
동시대 현대무용의 두드러진 족적 남긴 춤 ‘한글’
정년 후에도 춤의 자존 지키며
춤 방법론 연구하는 영원한 현역
105회 국내외 공연 통해
한글 우수성과 한글창제 정신 전파
혹은 여유를 보여주는 후기 춤
▲ 1991 홀소리 닿소리
[글로벌이코노믹=장석용 댄스 칼럼니스트] 뜨거운 여름의 흔적을 간직하고 포이동의 M극장은 가을의 전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른 가을의 해변처럼 차분히 자리잡은 이 극장의 사부는 이숙재(李淑在 한양대 명예교수) 밀물현대무용단 이사장이다. 현대무용사의 상당을 춤과 안무로 증거해온 그녀의 발레에서 모던댄스까지의 여정은 버거운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빛깔 좋은 춤으로 맑은 바람을 일으키며 세월을 즐기는 현재, 그녀의 외모에서 풍기는 도시 이미지는 현대성을 닮아있다. 광복이 되던 해, 정월 초이레, 대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춤에 연이 닿아 지금까지 춤작가와 안무가로서 이숙재는 춤의 자존을 지키면서 춤 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은퇴 후의 아름다운 삶, 결국 그녀에겐 정년이 없다.
▲ 춤밭을 일군 사람(4) 한글 춤 안무가 이숙재그녀의 밀물현대무용단은 1984년 창단 되어, 현대무용계의 주요 안무가와 무용수를 배출해 오고 있다. 2006년부터는 150석 규모의 무용 전용극장 M극장(M Theater)을 운영하며, 해외 춤 전용극장과의 교환 프로그램 및 아티스트 교류, 워크숍, 세미나 등 국제적 무용단체 및 핀란드, 중국, 일본, 호주, 미국 무용인들과의 활발한 교류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녀는 M극장을 통해 창작정신을 고무시키고 있고, 후진 양성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동 대학 무용과 대학원과 뉴욕대학교 대학원 무용과를 거쳐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1년 한국예술평론가협회로부터 최우수 예술가상을 수상한 이래, 그녀의 안무작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다.
밀물현대무용단은 1991년 10월 28일, 29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제13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홀소리 닿소리』공연을 시작으로 ‘한글’ 공연만 올 해 5월 15일 공연까지 해외 포함 105회라는 놀라운 공연 실적을 갖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한글창제 정신을 국내외에 알린 41개 버전의 작품은 해가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다.
한글춤 창안은 세종의 고뇌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1991년 이후 ‘한글’연작시리즈는『한솔이어라』(1992),『신(新)용비어천가』(1993),『한글기행』(1994), 『한글누리』(1995), 『뿌리깊은나무』(1996), 『세종은 오늘도 잠들지 않는다』(1997), 『한글 그 가상공간속으로』(1998), 『한글 새천년의 꿈』(1999)을 끝으로 20세기를 마감한다.
21세기 들어 『한글춤 2000』(2000), 『한글춤 새년천 꿈의 날개』(2001), 『춤추는 한글』(2002), 『한글아 놀자』(2003), 『세종은 잠들지 않는다』(2004), 『말과 글이 춤추는 한글 대탐험- 훈민정음』(2005), 『한글 25시』(2006), 『사맛디』(2007), 『한글춤 2350』(2008), 『훈민정음 보물찾기』(2009)로 이숙재의 한글사랑은 계속된다.
『말, 글 그리고 이야기』(2010), 『한글 춤으로 노래하다』(2011), 『뿌리깊은나무』(2012)는 다른 색깔의 춤이다. 이해준(한양대 생활무용학과) 교수 같은 후학들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실험적, 타 장르와의 크로스 오버, 정통 ‘한글’춤과의 다름과 같음을 견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한글공연을 비롯한 창작춤들은 ‘한글’춤의 진화에 지대하게 기여했다.
▲ 1993 신용비어천가무사(舞師) 이숙재는 128편의 작품을 안무하였고, 공연회수가 280여회에 달한다. 해외 공연기록은 15개국 30여회이다. 장수선무(長袖善舞), 기량과 여유로움이 가져다준 이숙재의 작업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초현대적 감각의 감동적 동작들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춤의 연속이다. 그녀의 춤은 총합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춤의 이미지화에 주력한다.
『세 개의 움직임에 의한 하나』(1985), 『빠른 시간 속의 빈터』(1986), 『갇힌 사람들의 노래』(1986), 『기류』(1986), 『망초 꽃 하나』(1987), 『달리는 힘들』(1987), 『두꺼운 정적을 깨고』(1987), 『두개의 힘』(1987), 『만남을 위한 분열』(1987), 『다시 하나로』(1987), 『태초의 소리, 흔들리기 위하여』(1988)는 시적 서정성을 고양시킨 작품들이다.
『얼굴 바꾸기』(1990), 『침묵하는 산』(1990), 『무명저고리』(1991), 『벼랑』(1991), 『내가 네게로』(1993), 『해빙』(1994), 『파도』(1994)는 80년대에 이은 90년대에도 시인 이건청과의 협업에 가까운 느낌을 공유하는 시제(詩題)를 작품화한 것들이다. 서정성 짙은 작품들 틈 새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자리잡고 춤은 시대적 아픔을 소명처럼 껴안았다.
▲ 2000 한글춤 2000『새천년 꿈의 날개』(2001), 『목화 희게 피는 날』(2006), 『신찬기파랑가』(2007), 『남한산성이야기』(2007), 『Sun & Moon, 한글춤 해외버전』(2009)은 새 세기를 맞아 치욕과 굴욕을 딛고 새 역사를 쓰자는 이숙재의 거대한 담론을 보여준다. 제2회 성남국제무용제 개막작 『남한산성이야기』는 장대 같은 빗 속 남한산성을 무대로 펼친 스펙터클한 작품이다.
전설이 되어가는 흐린 기억속의 춤꾼, 영원한 안무가 이숙재는 자신에 대한 가없는 엄격성으로 여린 감성들을 쓸어 담으며 업보 같은 춤에 정면으로 도전, 굴복시킨다. 운명처럼 닿아 있는 광복은 그녀의 화두였다. 그녀의 무지개빛 상상은 늘 짙은 향을 낳고 있다. 그녀의 중요한 덕목은 공유정신이며, 춤을 자신의 전유물이 아닌 참가자 공동자산으로 발전시킨다.
춤 완성도를 위해서 절대 완벽성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그녀의 춤의 현대성은 무한의 경외감을 갖게 한다. 그녀의 창작 작업에 동반하는 캐릭터 창조는 춤꾼 개개인을 캐릭터화 하는 방법론을 개발하게 된다. 이숙재는 식민지의 추억과 전쟁에 스쳐간 무용계를 극복의 무용계로 탈바꿈시키는 운명적 역할을 자임했다.
우리 무용계에 전범(典範)이 되고자 하는 그녀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끼 있는 젊은 무용가들의 춤 행위를 하나로 묶은 ‘M 탄츠테아터( M Tanztheater)’의 작업, M 극장을 통한 춤 교과서 작업으로 독특한 실험 장르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젊고 역동적인 예술, 실험 춤들을 격려하며 독립무용가들의 작품을 독립 공간에서 공연하도록 용기를 주고 있다.
▲ 2004 한글아 놀자이숙재 교수처럼 일관되게 자신의 색깔을 갖고 창작에 몰두하는 작가는 드물다. 지루할 정도의 ‘한글’ 춤 연구에 대한 집착과 창작 춤 연구는 상찬 받아야 마땅하다. 창작성이 돋보이는 그윽한 시적 서정과, 움직임과 춤의 함수관계를 조화롭게 엮은 현대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후기 춤들은 늘 해탈과 달관의 경지, 혹은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숙재의 작업에 일조한 문인은 이건청 시인이다.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여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움직이는 산’ 등의 명시를 잉태시킨 시인이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그의 시의 모티브는 때때로 이숙재의 춤의 모티브가 되곤 했다. 푸른 시단을 일군 이건청의 시는 안무가 이숙재가 선호하는 춤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숙재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한글’ 춤이다. 창작 양식의 유사성은 해마다 ‘한글 춤’을 즐기는 이들에게 다시 보게끔 만드는 대하드라마와 같은 오락성과 중독성을 띄고 있다. 한글 상품의 문화상품으로서 우수성과 외국으로부터 받은 찬사는 ‘한글 춤 전용관’의 탄생을 가늠케 한다. 한글 춤의 새로운 도약은 지속적 연구에서 올 것임이 분명하다.
▲ 한글 25시춤의 화려함과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그녀는 겸손과 배려, 절약과 실천의 가치를 존중해왔다. 그녀는 열정의 서정화로 그녀의 이름이 먹히는 입지를 개척해왔다. 꿈을 꾸는 춤꾼들이 밀물처럼 몰려오는 포이동, 선생의 춤은 댄스아스트의 톤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시기적 무풍(舞風)과 색조는 변화를 가미하며 새로운 시대를 영접하고 있다.
이숙재, 무용의 모든 영역에서 창조적 선구자 역할을 해왔고, 지구촌 사람들에게 ‘한글’ 춤의 매력을 기호학적, 춤 공학적 차원의 연구 대상으로 삼게 만들었다. ‘한글’ 춤을 인류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안무가, 그녀의 춤, ‘한글 스타일 춤’은 이미 대하 춤의 전형이 된 지 오래다. 그녀의 춤은 다양하게 격을 달리하며 승화되고 있다.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장석용 댄스 칼럼니스트(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