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좋은 것이고, 늙음은 나쁜 것' 이란 편견 팽배
이대로 살 것인가? 새로운 삶의 변화 줄 것인가? 선택 기로
'소리없이' 울지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최근 우리 사회에서 중년기(中年期)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 이유야 어쨌든 우리의 생애에서 중요한 시기이지만 지금까지 잊혀져 있던 시기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은 매우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린 시절(兒童期)’이나 ‘젊은 시절(靑年期)’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교에 아동학과나 청소년학과가 개설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령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늙은 시절(老年期)’에 대한 관심도 급속히 늘었다. 덕분에 이제는 ‘노년학(Gerontology)’이라는 학문 분야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세대
하지만 극히 최근까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개개인도 중년기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기보다 그런 시기가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한 저명한 사회학자의 표현대로 그들이 ‘소리내어 울지 않는 세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삶에서 그런 시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써 부인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인가? 이런 이유에서 지금이라도 중년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언제부터가 중년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하기 어렵다. 중년기라고 규정하는 시기가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문화마다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 시기가 계속 변하고 있다. 상당히 애매하지만, 중년기는 ‘더 이상 젊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늙은 것은 아닌 시기’다. 중년기(中年期)라는 명칭 자체가 이를 잘 말해준다. ‘중(中)’은 ‘가운데’ 를 뜻한다. 즉, 중년기는 가운데 시기라는 말이다. 물리적으로 가운데라면, 양 쪽에 서로 다른 무엇이 있지 않아도 산술적으로 가운데를 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가운데라는 것은 양 쪽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중년기는 무엇과 무엇의 가운데인가? 우리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는 어린이로 사는 시기이고, 두 번째는 어른으로 사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한 가운데는 소위 ‘청소년기’가 있다. 그리고 어른으로 사는 시기는 또 두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는 ‘젊은이’로 사는 시기이고, 두 번째는 ‘늙은이’로 살아가는 시기이다. 따라서 중년기는 ‘젊은이’와 ‘늙은이’의 가운데 있는 시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앞서 이야기한대로 ‘더 이상 젊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시기’다.
중년기는 지나가는 ‘젊음’과 다가오는 ‘늙음’이 공존하는 시기다. 하루하루 늙어간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은 시기다. 우리는 ‘청춘’이 삶의 절정이고, ‘젊은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는 편견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이 편견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늙어가는 것’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된다. 따라서 ‘젊은 것은 좋은 것이고, 늙는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미신(迷信)이 생겨난다. 덕분에 자신이 중년이라는 사실을 가능하면 감추고, 계속 청춘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계속 젊은 ‘척’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래저래 중년은 고달프다.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늙어간다는 것을 ‘몸’을 통해 느낀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다. 우선 외모가 눈에 띠게 달라져 간다. 어느 덧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하고, 눈가에 주름이 짙게 패이기 시작한다. 날씬하던 몸매도 어느덧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체력적인 면에서도, 젊었을 때는 며칠 밤을 새며 일을 해도 하룻밤 푹 자고나면 피곤이 다 풀렸다. 하지만 40대 후반이 되면 밤을 새지 않고 단지 며칠 간 무리해서 일을 하기만 해도 피곤이 풀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젊었을 때는 도시 근교의 산을 단숨에 올랐지만, 이제는 조금만 올라도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한다. 이 때 사람들은 “나도 이제 한 물 갔구나”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
중년이 되어간다는 것은 사회적인 관계에서도 느낄 수 있다. 20대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비록 경험은 없었지만 ‘푸릇푸릇’한 젊음과 패기에 넘쳐있었다. ‘세상이 모두 내 것’과 같은 느낌으로 노력하면 오르지 못 할 산이 없는 것 같은 느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덧 40대 후반이 되자, 20대의 패기와 꿈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을 볼 때마다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떠난 적도 없고, 떠나보낸 적도 없는데’ 속절없이 젊음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중년에는 가족 관계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이제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나는 소위 ‘자녀의 진수기’이므로 대부분의 부모들은 ‘텅 빈 둥우리’를 경험한다. 자녀들을 위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가고, 모든 것을 자녀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한국의 부모들에게 자녀들이 곁에서 떠나간다는 것은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를 새로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으로 느끼는 아저씨?아줌마
이런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는 중년기는 과연 어떤 시기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중년기는 현재의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시기다. “지금 나는 젊었을 때 꿈꿨던 대로 살고 있는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인가?” 등의 중요한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하는 시기다.
왜 중년기에 평가를 하는가? 평가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아직 변화할 기회와 여력이 있을 때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변화할 가능성이 없을 때 평가하는 것은 십중팔구 비난이나 비관(悲觀)이 되기 십상이다. 중년은 밝은 쪽에서 보면 삶의 ‘절정’에 있는 시기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저돌적으로 앞만 바라보는 청년과 회고적으로 과거를 반추하는 노년의 모습을 동시에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조망(眺望)과 자원(資源)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시기가 바로 중년기다. 따라서 정확한 평가와 새로운 변화에 대한 준비를 잘 한다면 중년기의 우리의 전체 삶에서 매우 귀중한 시기가 될 수 있다.
현재의 삶을 평가하는 시기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내포하고 있다. 중년이 위기의 시기라는 말은 다름 아니라 중년은 위험한 시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회의 시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마치 칼이 위험한 도구인지 편리한 도구인지를 판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칼이 범인의 손에 들어가서 사람을 해치게 되면 흉기가 되지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주부가 사용하면 유용한 도구가 된다.
중년기는 노쇠해지고 쇠퇴해지는 시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일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게 하고, 나이에 대한 시간전망을 바꾸어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하며, 미래의 삶에 대해 준비하게 하는 귀중한 발달의 기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년은 위기의 시간이 되기도 하지만 보다 나은 삶을 설계하고 보람 있는 노후를 설계하고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중년의 위기는 발달과 변화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가치관이나 행동의 변화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심리적 혼란감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소리 없이’ 울지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중년의 변화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