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19회)]
권위의 속성은 베품과 공유…권위주의는 지배와 복종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할 수 있는 '리더십 부재의 시대'
'큰 목소리' 보다 '한 말씀'의 권위가 사태해결에 도움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한 때 권위(權威)는 우리가 버려야 할 전통 문화의 하나라고 강조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모범을 보이기 위해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 정장을 하지 않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회의를 하는 모습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권위를 싫어한다는 한 대통령은 시정의 갑남을녀(甲男乙女)나 할 수 있는 언사를 자주 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 우리 사회가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심하게 겪는 이유가 바로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존경할 만한 리더가 없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렇다면 가정과 같은 작은 조직에서나 국가와 같은 큰 조직이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과연 권위는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버려야할 것인가?

그렇다면, 권위의 핵심 즉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이 점에서 권위는 두 가지로 나뉜다. 권위를 뜻하는 영어의 명사 ‘authority’는 두 개의 형용사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우리말의 ‘권위 있는’과 같은 뜻의 ‘authoritative’이다. 예를 들면, “저 분은 국악에 권위가 있다.” 라든지 “저 분이 이 조직에서 제일 권위 있는 분이야.” 또는 “나는 이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고 싶어.”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다. 이런 의미에서의 ‘권위’는 ‘어떤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을 뜻한다. 당연히 이런 권위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것이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다.
갑(甲)과 을(乙)이 어느 분야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할 때, 양쪽이 다 인정하는 그 방면의 권위자가 ‘결론’을 내리면, 양쪽이 다 수긍하고 논쟁에 따른 불필요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가정에서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자녀들끼리의 갈등을 ‘한 말씀’ 해 주시는 것으로 일거(一擧)에 해결할 수 있다. 반대로, 부모가 권위가 없을 때는 어느 자녀도 그 말에 따르지 않고 계속 갈등할 수밖에 없다.
더 큰 조직, 심지어는 국가와 같이 큰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수없이 대립되는 많은 이해 당사자들이 서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투고 경쟁하는 곳이다. 동시에 많은 대립되는 의견들과 사상들이 서로 강하게 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거의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국가의 특정한 정책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세력들을 모아 ‘큰 목소리’를 내려고 아우성이다.
이런 경우에도, 만약 양 측에서 다 인정하는 권위자가 있다면 갈등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큰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권위자의 ‘한 말씀’이 사태 해결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정치적 이슈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지 않은 관망자들도 권위자의 판단을 따르게 되고, 그 판단에 따르지 않는 집단은 결국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되어 그 영향력을 잃게 된다.

‘권위 있는’과 ‘권위주의적인’ 것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그것은 권위의 핵심인 ‘남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 즉 힘의 원천(源泉)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힘은 크게 두 가지의 원천에서 나온다. 하나는 ‘능력’ 또는 ‘과제수행력’에서 나온다. 어느 분야나 업종에서도 그 분야에서 요구하는 역할이나 과제를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만약 한 학자가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과 업적을 인정받는다면, 그는 그 방면에 ‘권위 있는’ 교수가 된다. ‘노벨상’이 고귀한 이유는 바로 그 상의 수상자는 전 세계적으로 ‘권위자’로 인정받게 된다는 점에 있다. 만약 제비뽑기로 수상자를 정한다면, 누가 노벨상과 수상자의 권위를 인정하겠는가?
또 다른 힘의 원천은 ‘지위나 신분’이다. 다른 사람을 지휘하고 통솔할 수 있는 힘이 당사자의 지위나 신분에서 나온다면 이것은 ‘권위주의적’이 된다. 예를 들면, 종교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 즉 ‘승려’나 ‘목사’나 ‘신부’라는 신분에 의해 행사된다면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종교지도자가 된다. 권위주의적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과시하고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이 둘의 차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극명하게 차이가 있다. 자신의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즐긴다. 왜냐 하면, 능력은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고 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면 줄수록 자신의 권위는 더 높아지고 영향력은 더욱 더 커진다. 아랫사람들도 권위자를 존경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려는 ‘역할모델’로 삼기 때문에 관계가 친밀하고 상호 보완적이 된다. 당연히 그 관계는 민주적이고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된다.
반대로 ‘권위주의적’ 힘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가 없다. 자신의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지위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다. 지위나 신분은 그 속성상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거나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통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유가 ‘사장’이라는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사람은 당연히 사장의 지위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지위나 신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항상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없어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힘도 없어진다는 슬픈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은 능력도 없는 사람이 단지 지위가 높다는 것 때문에 명령을 내리는 사실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불평이 싹튼다. 겉으로 드러나는 복종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호시탐탐(虎視耽耽) 그 자리를 빼앗을 기회를 노리게 된다.

권위 그 자체가 이롭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권위 그 자체는 버릴 것도 아니고 지킬 것도 아니다. 다만 권위의 긍정적 측면, 즉 능력과 과제수행력에 기인하는 권위는 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계속 유지하고 조장해야 한다. 그리고 다방면에서 다양한 권위자가 나오도록 교육해야 하고 그 권위를 인정해주어야 한다. 반면에 권위의 부정적 측면, 즉 지위와 신분에 의한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한다.
지위나 신분에 의해 ‘힘’을 가진 사람이 ‘능력’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제일 바람직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래도 내가…. 인데, 어떻게 너희들이 내 말을 안 들을 수 있냐?” 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어지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가 모두가 바라는 ‘민주적’이고 ‘공평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