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중심 억압되고 부정된 성욕 남성들 밖에서 배출구 찾아
조선시대 기생문화?첩문화가 오늘날 퇴폐적 유흥문화의 원조
자녀 앞에서 자연스런 애정 표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성교육
이처럼 성욕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특성은 비단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에서도 나타난다. 즉 부부 사이에서도 성적인 것이 무시되거나 억압된다. 조선시대에 전통적인 양반집에서는 남편은 사랑채에서 그리고 부인은 안채에서 생활한다. 부부간의 성적인 관계는 단지 자식을 생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성 그 자체의 즐거움을 위한 합방은 가능한 한 자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자녀들은, 설령 너무나 사랑하는 신혼부부라고 할지라도, 부모가 보는 앞에서는 그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서로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덤덤하게 생활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이라는 밀양아리랑의 가사가 있을까? 아마도 서양에서는 달려나가 서로 포옹을 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했을 것이다.
동시에 부모도 자녀들 앞에서는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애정 표현을 삼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부모들은 자녀들 앞에서 이성이 아니라 성이 없는 ‘무성(無性)’인 것처럼 행동한다. 부모들의 자연스런 애정표현을 보지 못하고 자라난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애정표현에 서툴거나 안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성욕을 만족하려는 것은 ‘본능(本能)’이다. 이는 배워야만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억압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본능은 적당하게 만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욕은 부부간의 원만한 성생활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제일 바람직스럽다는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는 이 관계를 보호해주기 위해 소위 ‘가정파괴범’은 중형으로 다스리고 있다.
부부간의 성적인 관계를 억압하거나 부정적(否定的)인 것으로 치부하는 문화에서 성욕은 결국 가정 밖으로 나가게 된다. 특히 남성의 경우, 가정 안에서 해결 못한 성욕을 푸는 배출구를 가정 밖에서 찾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을 축으로 하는 가족문화를 가진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기생문화(妓生文化)’ ‘첩문화(妾文化)’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유흥문화(遊興文化)’가 번성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건전한 놀이문화보다 퇴폐적인 유흥문화가 단속을 비웃듯이 업종을 바꾸어가면서 번창하는 것도 다 이런 문화적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문화들의 공통분모는 바로 ‘성’이고 부부관계 이외의 이성과 즐기는 성욕 해소가 핵심이다. 따라서 남자들만 모이는 곳에는 으레 이들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있기 마련이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사업상 접대하는 자리는 으레 술시중을 드는 여성이 있는 술집이 무대가 된다. 오죽하면, “절구통에 치마를 둘렀어도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이라거나 “술에 여자는 바늘과 실이다”라는 속담까지 있을까?
조선시대에 한양에 있던 고관들이 지방에 감사나 관찰사로 부임할 때 부인을 대동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왜냐하면 지방에 내려가면 ‘관기(官妓)’들이 수청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부인의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관청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구태여 부인을 대동할 필요가 없었다.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데에는, 평양이 지리적?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색향(色鄕)’이라고 불릴 만큼 미인이 많은 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문화 속에서 성장한 일부 한국 남성들에게는 성과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있다. 우선 집안의 여성, 즉 어머니와 누이, 딸 그리고 부인은 ‘성녀(聖女)’다. 이들은 성(性)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관되어 생각해서도 안 된다. 아직까지도 전통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지방에서는 남자손님이 집을 방문하면 집안에 부인이나 딸이 있음에도 찻집에 커피를 주문한다. 그러면 찻집에서 일하는 여성이 배달을 와서 커피를 타준다. 집안의 여자는 함부로 아무 남자에게나 커피를 타주는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스러운’ 여자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가정 밖의 여성 ‘성녀(性女)’가 있다. 이들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여성, 즉 성욕의 대상이 되는 여성이다. 집안의 여성을 ‘성녀(聖女)’로 필요 이상으로 성적인 면을 배제시켜 놓은 대신 그 외의 여성은 지나치게 성의 색깔을 덧칠해 ‘성녀(性女)’로 인식한다. 그래서 외부의 여성들에게는 직장에서나 다른 사석에서 성적인 농담을 건네거나 추근대는 것이 오히려 남자다운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남성들이 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남성들의 성과 관련된 추문들은 다 이런 이중잣대에 기인한 것이다. 직장의 회식 자리에서도 젊은 여사원들은 상사들 옆에 앉아서 술을 따라주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학교의 회식 자리에서는 젊은 여교사는 교장에게 술을 따라주라는 교감의 압력을 받는 경우가 아직도 존재한다. 아직도 같은 직장의 여성동료를 ‘기생’과 구별하지 못하고 수청을 강요하는 문화의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다.
남자들끼리 즐기는 술자리에서 집안의 여자, 즉 부인이나 딸 자랑을 하는 것은 ‘팔불출’이고, 부인을 위해 일찍 귀가하는 남자는 “부인의 치맛폭에 쌓여 사는 못난이”로 치부된다. 한국의 기혼 남자들은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집안의 여자들에 대해서는 잊는 것이 ‘남자다운’ 것으로 오해하고, 한껏 호기를 부린다.
현재 한국 문화는 전통적인 부자중심의 문화에서 부부중심의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남녀 간의 애정 표현이 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공공의 장소에서도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성은 지나치게 개방적이면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게 되므로 자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거나 금기시하면 본능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바람직하지 못한 곳에서 해소된다. 성은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만족되면, 삶의 즐거움과 활력을 주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애정 표현이 제일 바람직한 성교육이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