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은 같은 시공간에서 오래 살면서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
첫 눈에 사랑에 빠질 순 있어도
첫 눈에 정 들 수는 없다
서양부부는 사랑 때문에 살고
한국부부는 정 때문에 산다
서양에선 미워서 헤어지지만
한국선 정 떨어져서 헤어진다
한국인의 제일 대표적인 정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정(情)’이라고 답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 속에 ‘정’이 들어간 말이 많다. 예를 들면, ‘모정’ ‘부정’ ‘우정’ 등의 단어뿐만 아니라, ‘정 들었다’ ‘정 떨어진다’ ‘정든 집’ ‘정이 많은 여자’ 등 ‘정’을 이용한 표현들이 많이 있다. 이처럼 많이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의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 정이 사랑보다 더 슬플까? 비록 가요의 가사로 쓰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랑과 정의 차이를 알면 이해가 된다. 우선 ‘정이 들다’에서 보듯이 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서서히 쌓여가는 감정이다. 반면에 ‘사랑에 빠지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랑은 급격하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첫눈에’ 정이 들 수는 없다. 그만큼 정은 상대에게 더 많은 시간동안 관여해서 쌓여가는 감정이다. 그래서 급격한 감정인 사랑보다 그 대상을 잃었을 때 슬플 수밖에 없다.
사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낄 수 있지만, 정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비록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오래 생활하면 정이 든다. 예를 들면, 오래 산 집에 정이 들 수 있고, 오래 사용한 만년필에도 정이 들 수 있다. 물론, 오래 타고 다닌 차에게도 정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산 집이라도 사랑할 수는 없고, 아무리 오래 사용한 차라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만큼 사랑은 광범위한 대상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오랜 시간’과 ‘같은 공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정이 들기 위해서는 ‘흉허물’이 없어야 한다. “세상에 흉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도 있듯이, 결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이 들면 상대방의 결점이 결점으로 보이지 않아 주관적으로는 흉허물이 없는 사이가 된다. 오랫동안 해로(偕老)하는 노부부들이 상대 앞에서 편안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도 흉허물이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비교해서 정이 다른 점은 포괄적이라는 점이다. 보통 서구 문화의 특징은 ‘분석적(分析的)’인 반면, 동양 문화는 ‘통합적(統合的)’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식 표현으로는 서구 문화를 ‘either/or(둘 중의 하나)’의 문화인 반면, 동양 문화를 ‘both/and(둘 다)’의 문화라고 한다. 계속 분석적으로 사고하다 보면 결국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높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elevator)’가 있는데, 이 명사형은 ‘elevate(올리다)’라는 동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올라갈 때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내려올 때도 사용한다. 하지만 ‘올리다/내리다’ 둘 중에서 ‘올리다’를 선택해 ‘엘리베이터’로 명명했다. 하지만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동양에서는 ‘올리다/내리다’를 동시에 표현하는 ‘승강기(昇降機)’로 명명했고 우리 말로는 ‘오르락내리락’으로 동시에 표현한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면, 서랍을 영어로는 ‘drawer’라고 하는데, 이는 ‘빼다’라는 뜻의 ‘draw’에서 온 명사형이다. 즉, ‘빼다/닫다’의 두 기능 중 ‘빼다’를 선택해서 표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방언이기는 하지만 ‘빼닫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두 기능을 동시에 표시한다.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은 ‘미닫이’나 ‘나들이’ 말고도 많이 있다.
서양 부부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살고, 한국 부부들은 ‘정’이 들었기 때문에 산다고 한다. 한 대상에 대한 감정은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100% 완벽한 사람은 없고, 크고 작은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미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서양 부부에게는 ‘사랑’ 혹은 ‘미움’이 있을 뿐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혹은 미워할 뿐이다. 서구 문화에서는 한 대상에 대해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을 ‘양가감정(兩價感情)’이라고 부르면서 제일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고 피해야 할 상태라고 여긴다. 서로 사랑하는 동안에는 함께 살지만, 서로 미워지면 헤어지는 것이 당연시된다.
“몇십 년 함께 살다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정’은 ‘미운 정/고운 정’이 함께 있고, 한국 사람들은 한 대상에 대해 미운 정과 고운 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같이 살다보면 고운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운 면도 동시에 있다. 하지만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소중한 감정으로 보듬고 살아간다. 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통합적으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간다. 한국 사람들은 미워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이 떨어져서’ 헤어진다.
‘미운 정 고운 정’을 느끼면서 사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유는 정이 가족관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이 들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함께 흉허물 없이’ 지내야 한다. 이런 조건을 제일 만족시키는 관계는 가족관계다. 가족은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미워한다고 쉽게 끊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미워하는 감정도 중요한 감정으로 인정하고 함께 지니고 살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제일 정이 많이 든 사람’으로 첫째로 ‘어머니’, 둘째로 ‘아버지’ 셋째로 ‘형제나 자매’를 꼽았다. 즉, 제일 정이 많이 든 사람들은 가족이다. 이것은 정이 가족들 사이에서 제일 많이 나타나는 감정이고, 동시에 헤어질 수 없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람들의 인간관계의 원형은 가족이다. 가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조직, 예를 들면 회사나 학교에서도 조직의 이름을 붙여서 “**가족”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결국 가족관계가 제일 중요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아저씨’ ‘아주머니’라는 친족 사이에서 사용하는 명칭을 사용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에게도 ‘언니’라고 부르면, 막걸리집에 들어가면서도 ‘이모’하고 부르는 우리의 문화를 보면 얼마나 정이 많은 사람들이고,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지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이혼하고, 가족들이 해체된다고 염려하고 있다. 이는 ‘정이 드는’ 결혼생활이 점차로 ‘사랑에 빠지는’ 결혼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는 무 자르듯이 ‘사랑’과 ‘미움’ 두 가지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관계는 ‘고운 정’과 ‘미운 정’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관계다. 미워질 때 고왔을 때를 떠올리고, 고울 때 앞으로 미울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관계가 성숙한 관계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