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스트레스 없는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성숙함은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 '~함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사랑하는 마음
의심이 없기 ' 때문에(~because of)'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심 '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이다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교수] 우리는 크게 생각해보지 않고 갈등(葛藤)은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가정이든 회사든 어떤 조직도 갈등이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과연 갈등이 없는 상태가 바람직한 것일까? 과연 갈등이 없는 상태가 가능하기는 한가? 갈등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으로는 스트레스(stress)가 있다. 스트레스는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만병의 근원처럼 여기기까지 한다. 과연 스트레스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가질까? 스트레스가 없으면 우리는 행복을 느낄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미움은 단일 차원의 양 쪽 끝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완전한 사랑을 10이라고 가정하고 완전한 미움을 0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한 대상에 대해 0에서 10사이의 어느 점수만큼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많으면 10에 가까운 점수를 가질 것이고, 반대로 미움이 많으면 0에 가까운 점수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남편에 대해 8의 감정을 가진 부인이 4의 감정을 가진 부인보다 더 남편을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공식에서는 미움이 적을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사고는 사랑과 미움을 단일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사랑과 미움은 시소와 같아서 한 쪽이 내려가면 다른 한 쪽이 올라가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감정이나 태도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 째 요소는 방향(方向)이다. 상대에게 사랑을 느낄 것인지 아니면 미움을 느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감정이나 태도의 방향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극히 소수의 부모만이 ‘자녀를 미워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처럼 사랑과 미움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사랑과 미움의 상대적 크기다. 만약 한 대상에게 사랑을 6만큼 느끼고 미움을 5만큼 느낀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한다고 느낀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약 상대에게 느끼는 사랑보다 미움이 더 크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고 느낀다. 따라서 상대를 사랑하려면 미움보다는 사랑의 감정이 더 커야 한다.
감정이나 태도의 두 번째 요소는 세기, 즉 강도(强度)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세기의 문제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냐?’라는 질문은 ‘자녀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과는 다르다. 감정이나 태도의 강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움이 적어질수록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즉, 사랑과 미움은 부적(否的) 상관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자녀를 미워하지 않아서 일까? 어머니는 정말 자녀를 사랑만 하고 미워하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크다고 여길까?
긍정적 감정이나 태도의 강도는 포용할 수 있는 부정적 감정의 강도에 비례한다. 우선 상대에게 긍정적 감정을 가졌다는 것은 부정적 감정보다 긍정적 감정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방향을 결정하는 문제다. 일단 상대에게 긍정적 감정을 유지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상대에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의 크기에 의해 긍정적 감정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더 쉽게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미움의 크기가 3인 경우와 6인 경우, 어느 부모가 더 자녀를 사랑하는가?
미움의 크기가 3인 경우에는 4만큼 사랑하면 결과적으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만약 미움의 크기가 6인 경우에는 최소한 7만큼 사랑해야 자녀를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4만큼 사랑하는 부모와 7만큼 사랑하는 부모는 과연 누가 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4보다는 7이 더 강하게 사랑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갑자기 5정도의 미움이 왔을 때 이미 7만큼 사랑하는 부모는 계속 자녀를 사랑할 수 있지만, 4만큼의 사랑을 하고 있던 부모는 사랑에서 미움으로 방향이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미움이 적을수록 사랑을 많이 한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칙 중에 ‘최소노력의 원리’이란 것이 있다. 즉, 결과가 동일하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을 한다는 것이다.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다 심리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4만큼의 긍정적 감정이 있으면 되는 상황에서 7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7에서 4를 뺀 3이라는 심리적 에너지는 다른 곳에 사용한다. 그것이 한정된 심리적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포용할 수 있는 미움의 양이 제일 많다는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쁜 사람이라고 관계를 끊을지라도 어머니는 단지 ‘내 새끼’라는 이유 하나로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8만큼 미운 짓을 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하고 포기하고 관계를 끊는다고 해도 어머니는 9만큼의 사랑으로 자식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하다.
어린이들은 모순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많은 떡볶이집이 있는 것을 보고 ‘다 없어지고 한 집만 남으면 손님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오히려 떡볶이집이 많이 몰려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떡볶이를 먹으려고 신당동으로 몰려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즉, 한 가지만 보고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리겔(K. Riegel)이라는 심리학자는 성숙한 사고의 특징으로 ‘어떤 사실이 진실일 수도 있고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고를 ‘변증법적 사고’라고 명명하였다. 변증법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비일관성(非一貫性)과 모순(矛盾)을 잘 감지하고, ‘정(正)’과 ‘반(反)’으로부터 ‘합(合)’을 이끌어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성숙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현실의 한 면만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사고한다. 세상에는 오직 ‘옳고 그름’만 존재하고 ‘적과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자신의 생각은 옳고 그와 다른 사고는 그릇된 것이다. 나와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동지’이고 나와 다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적’일 뿐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단일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은 다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은 우리의 삶은 평온이 아니라 갈등의 연속인 것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그리고 갈등을 통해 변화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믿음은 불신을 양식으로 성장하고, 선은 악이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포용할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불신의 양이 나의 믿음의 강도를 결정한다. 성숙한 사람은 ‘~ 때문에(because of)’ 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임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삶을 산다.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