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리조트 참사는 '빨리빨리' 문화가 만들어낸 '人災'
구석구석 신경쓰면 '꽁생원''째째한 사람' 부정적 평가
법 어기고 무모하게 일 진행하면 '통 큰사람' 긍정적 평가
대충 갖추고 살면서 사고 나는 것은 팔자?운명으로 치부
안전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인재(人災)’였다는 것이 경찰의 조사 결과 또다시 드러났다. 왜 이런 유사한 사고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것일까? 언론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소위 ‘안전불감증(安全不感症)’이 그 주요한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쉽게 말해 ‘안전에 대해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증세’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증상이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는 것일까?
한 개인의 ‘성격’이나 한 조직이나 사회의 ‘문화’는 ‘주어진 환경 조건 하에서 욕구를 가장 잘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농촌에는 ‘농촌이라는 환경 속에서 제일 잘 살 수 있는 방식’으로 농촌문화가 형성될 것이고, 어촌에는 ‘어촌이라는 환경 속에서 제일 잘 살 수 있는 방식’으로 어촌문화가 형성된다. 따라서 농촌문화와 어촌문화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아울러 다른 점도 많이 있다.
한국 문화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안전불감증’이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설명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안전불감증’의 반대는 아마도 ‘안전민감증’ 정도가 될 터인데, 그렇다면 안전에 민감하면 잘 살 수 없었다는 결론이 될 수밖에 없다.
‘안전불감증’은 다르게 표현하면 사실 ‘위험불감증(危險不感症)’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닥쳐 올 위험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증세’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위험에 대해 민감하면 오히려 욕망을 해결할 수 없는 문화를 형성하였을까?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위험에 민감한 생활을 하려면 여러 요인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위험에 민감한 것이 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집을 짓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안전한 집을 지으려면 설계에서부터 공사에 이르기까지 좋은 자재를 사용하고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쓰며 꼼꼼하게 집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짓는 것이 실질적으로 이익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비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렇게 집을 짓는 것이 사회적 규범으로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날림공사로 위험하게 집을 지은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매장당하는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자랑스럽게 ‘한강의 기적(奇蹟)’을 내세운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이룬 경제적 업적을 우리는 단 60년 만에, 그것도 전쟁의 참화 속에 완전히 잿더미가 된 상태에서 이룬 것을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렇게 빨리 경제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물론 한국사람들이 능력이 많고 부지런하게 일을 한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착실하게 차근차근 성과를 축적해가기 보다 ‘빨리빨리’ 눈에 보이는 성과(成果) 위주의 생활이 몸에 밴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구석구석 세심하게 신경을 쓰며 안전하게 일을 하려는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는 ‘꽁생원’이나 ‘째째한 사람’ 또는 심하게는 ‘쪼잔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면에 무모하게 일을 진행하거나 법을 어기면서 성과를 빨리 내는 사람을 ‘통이 큰 사람’이라든지 ‘배짱이 있는 사람’ 또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 등으로 부르면서 오히려 칭찬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원칙을 지키고 안전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단체나 사회에서 도태(淘汰)될 위험에 빠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강하다는 것이다. 낙관주의(樂觀主義)를 ‘세상과 인생을 희망적으로 밝게 보는 태도’라고 정의한다면, 낙관주의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많은 위안과 힘을 얻는다.
하지만 낙관주의가 진정한 위로와 힘을 주려면 그것은 현실적(現實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희망적 태도의 근거가 현실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지능이 우수한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에 합격하여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현실적 낙관주의다. 이 낙관적 태도는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반면에 지능이 우수하지도 않고 게으른 학생이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비현실적 낙관주의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요행을 바라거나 자신에게 닥친 부정적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이나 환경에 돌리는 우(愚)를 범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가지게 되었을까? 비현실적 낙관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을 ‘현실적 비관주의’라고 볼 수 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아무리 희망적으로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절망(絶望)뿐이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좋아질 수 있는 희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비관주의(悲觀主義)에 빠질 것이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Kierkegaard, Sooren Aabye)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다. 비관주의에 빠진 삶은 결국 ‘죽음을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서는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비현실적’으로나마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록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지면 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 그럴 거야” 등의 근거가 없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안전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래저래 돈도 없고 시간도 없지만 살 집은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대충 집모양만 갖추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고가 나는 것은 팔자(八字)나 운명(運命)에 맡기고 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문화에 비현실적 낙관주의가 강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한반도에서 보통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는 걸 반증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죽했으면 비현실적으로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했을까? 과거에는 비현실적으로나마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곤궁한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한번 형성된 문화가 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개인의 행동은 마치 작은 나룻배 같아서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문화는 마치 항공모함 같아서 선회(旋回)하려면 큰 원을 그리면서 천천히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현재는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수 백년 동안 척박한 환경과 억압과 착취 속에서 생활해오면 습득된 문화는 아직도 과거의 방향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현실적 낙관주의’를 가질 만큼 우리나라는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도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탕주의’나 ‘안전불감증’ 등이 도처에서 활개치고 있다. 이런 잘못된 관행을 바꾸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아직도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단지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자체가 인권을 존중하고 인명을 제일 귀하게 여기도록 바뀌어야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