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학살책임자 아이히만 재판서 '무죄' 주장
한나 아렌트 "惡이 저토록 평범하다니…" 탄식
우리 누구도 아무런 이유 없이 참혹한 일 벌이는
아이히만과 이근안같은 하수인 될 수 있음 증명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 벤 구리온 수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집단 학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을 체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아이히만이 체포된 것은 11일 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산 페르난도에서였다. 독일 패전 뒤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그는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며 숨어 살았다. 이스라엘 비밀첩보 조직 모사드(MOSAD)요원들이 전쟁이 끝난 뒤 15년간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했다.
미국 ‘뉴요커’지가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보낸 임시특파원은 바로 유명한 정치철학자이며 자신이 독일계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였다. 그녀는 이 재판을 방청하고 난 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 in Jerusalem)』이라는 책을 썼다. ‘악(惡)의 평범성(平凡性)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케 하였다. 사람들은 죄 없는 유대인 600만명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인 책임자인 아이히만은 선량하고 평범한 자신들과는 다른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린 괴물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는 아이히만은 베토벤을 사랑하고, 소아 성애 소설인 '롤리타'를 혐오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는 나치의 정강(政綱)도 잘 몰랐고, 심지어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단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좋은 관리였으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이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재판 중에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유대인이 증인으로 나왔다. 재판관이 그에게 피고가 아이히만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자 피고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던 증인은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깨어난 증인은 졸도한 이유에 대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저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나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고, 내 속에도 아이히만이 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렌트의 책이 우리를 경악시킨 것은 책의 부제에도 분명히 나와 있듯이 ‘악의 평범성’이다. 바로 우리와 같이 평범하게 하루하루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갑남을녀(甲男乙女)도 상황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나는 관료로서 명령을 지키기로 서약하였고 단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기 때문에 무죄다”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이 잔인한 진실이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아렌트 자신도 “악이 저토록 평범하다니…”라고 탄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소위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이 『고문기술자 이근안』라는 책을 저술하기까지 하면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말을 공공연히 해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으며 그 후 목사까지 되었다.
아이히만의 사례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계속 일어나자 ‘사람들은 얼마만큼 다른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는가?’ ‘왜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명령에 복종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예일대 심리학자 밀그램(Stanley Milgram)은 아마도 심리학에서 제일 유명한 실험 중의 하나인 ‘권위(權威)에의 복종(服從)’ 실험을 하였다.
밀그램은 광고를 내 심리학 실험에 참가할 사람을 쌍으로 모집하였다. 제비를 뽑아 두 사람 중 한 명은 ‘학생’, 다른 사람은 ‘선생’의 역할을 맡겼다. 이 때 피험자들은 항상 ‘선생’의 역할을 맡도록 미리 각본이 짜여 있었다. 이들은 실험의 목적이 ‘처벌의 강도가 학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에 참여한다고 거짓 정보를 받았다. 선생은 학생들이 외어야 할 단어를 알려주고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는 전기충격을 주게끔 하였다. 선생의 책상 위에는 전기충격을 줄 수 있는 장치가 놓여 있었는데 다양한 강도의 전기충격을 줄 수 있는 스위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충격은 15V에서 시작하여 450V까지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강도에 따라 ‘약함’, ‘매우 셈’, ‘위험함’ 등의 표찰을 붙여놓았다. 학생은 옆방에서 두 손에 묶어 충격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은 인터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실험이 이루어지는 동안 ‘학생’ 역할을 맡은 사람은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수를 했고, 그 때마다 ‘선생’은 계속 전기충격을 주게 되고 그 강도는 매번 더 세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이 받는 고통은 커져갔고, 그에 따라 신음소리,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 심지어는 그만하자고 사정하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300V에서는 더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생’이 충격을 주기를 망설이거나 못주겠다고 하면, 옆에 있던 실험자가 계속 하라고 종용하면서 만일의 경우 모든 책임은 실험자가 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실험의 결과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실험에 참가한 ‘선생’ 40명 모두가 300V까지 충격을 주었으며, 300V 이후에는 ‘학생’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약 66%가 최고치인 450V까지 주었다. 물론 많은 피험자 즉 ‘선생’들이 상대방의 고통에 갈등을 많이 느꼈고, 실험을 계속 하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하였다. 하지만 66%가 최고치까지 충격을 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후 문화가 다른 여러 나라에서 또한 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
‘권위에의 복종’ 연구 결과, 복종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들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경우 복종 행위가 현저히 줄어든다. 위의 실험에서 만약 ‘학생’에게 큰 불행이 닥칠 경우 ‘선생’이 책임을 져야한다면 복종 행위가 당연히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둘째, 피해자의 고통이 직접적으로 느껴질수록 복종 행위가 줄어든다. 위의 실험의 경우, ‘학생’의 고통을 ‘선생’이 직접 느낄 수 없고 단지 인터폰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기 때문에 쉽게 복종할 수 있었다. 셋째, 권위자의 권위나 전문성 등이 의심을 받을 때는 복종 행위가 줄어든다. 위의 실험에서 연구자가 권위를 나타내는 ‘가운’을 입고 계속 하도록 종용하는 경우보다 청바지를 입고 종용할 때 복종 행위가 훨씬 줄어든다.
밀그램은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보통 사람들이 아무런 동기적 이유 없이 자신들의 일상적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참혹한 일을 벌이는 하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말할 때 언제나 똑같은 단어로 표현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 ‘말하기의 무능력함’은 ‘생각하기의 무능력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은 결국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력함’이었다고 지적하였다.
불필요한 ‘권위에의 복종’을 막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평소에도 철저한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비록 권위자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최후의 책임은 결국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평소에 익히고 있어야 한다. 또한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고통에 대해 둔감한 소위 ‘싸이코패스’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명령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 감정에 따라 쉽게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행동을 할 수 있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