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종교를 가진다는 것
생애 초기에 믿음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항상 불안
궁여지책으로 찾는 것이 '우상' 만들고 숭배하는 것
우상에 의지하면 할수록 점점 약해지는 '악순환' 빠져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특정 종교집단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특히 이 종교집단이 1987년 경기도 용인 오대양 공장 천장에서 남녀 시체 32구가 발견되어 전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소위 ‘오대양변사사건’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는 종교단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과연 성숙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과 종교 활동이 무엇인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산간 오지에서 소위 ‘원시적(原始的)’인 생활을 하는 종족들도 다 다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있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몇몇 종교와 유사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신앙의 대상도 다르기는 하지만 소위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가장 ‘인간적인’ 활동 중의 하나일 수도 있다.
많은 발달심리학자들이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근본 원인을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유난히 ‘무기력한’ 어린 시절을 거쳐야 하는 인간의 특성에서 찾는다. 발달 상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일 년 정도 먼저 태어난다. 소나 말과 같은 동물들은 태어난 지 얼마 후 곧 일어나 걷고 뛰며 어미를 따라다니며 나름의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사람은 태어난 지 최소한 일 년이 지나야 자기 스스로 엄마를 따라다니고 엄마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일 년 동안 인간은 아주 무기력한 상태이고 엄마, 즉 다른 사람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아주 나약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그 무엇”에 의한 도움과 그 무엇이 언제든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엇의 도움이 없다면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요인들에 의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원하지 않지만 계속 밀려온다는 것을 깨닫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은 절대적이고 불변하고 영원하고 전지전능하다고 여기는 그 “궁극적 타자(窮極的 他者)”의 존재를 믿고, 그 관계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삶과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의 삶에 이렇게 중요한 영향을 주는 종교와의 관계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다. 종교가 살아가는 데 긍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종교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종교심리학자들에게도 큰 고민을 안겨주는 주제는 “과연 종교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해를 끼치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다.
전생애발달심리학자인 에릭슨(E. Erikson)은 생애 첫 일 년을 “기본적 신뢰(信賴) 대 불신(不信)”의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신생아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사람(일반적으로는 부모, 특히 어머니)과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을 믿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주위에서 돌보아주는 사람들은 신생아가 이 능력을 잘 발달시킬 수 있도록 따듯하고 일관성 있고 예측할 수 있는 태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 신생아는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고, 이후에는 이 바탕 위에서 다양한 발달 과제들을 수행해 간다.
불행하게도 신뢰를 발달시킬 수 있는 좋은 분위기가 아니라 불안정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들이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성장하게 되면 신생아들은 ‘불신’을 느끼고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 불신의 바탕 위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과 세상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이 첫 번째 시기를 ‘기본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뜻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이 과제의 달성 여부에 의해 앞으로의 발달이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신뢰의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불신의 바탕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예를 들면, 물이 반만큼 들어 있는 컵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어떤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다”고 부정적으로 본다. 이 두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서로 다르다.
생애 초기에 ‘기본적 신뢰’를 형성한 사람은 한 평생 동안 “희망(希望)”이라는 좋은 덕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이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생애 초기 가장 나약하고 무능한 시기에 다른 사람과 세상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살아가면서 비록 어려운 일이 닥칠 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힘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능히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희망”의 탑을 쌓을 수 있다.
생애 초기에 이 믿음을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항상 불안하다. 그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정말로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준 부모, 특히 어머니조차 믿을 수 없는 사람이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그 무엇’인가를 믿지 않으면 평안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항상 불행한 일이 닥칠 지도 모르고, 자신은 그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찾는 것이 소위 “우상(偶像)”을 만들고, 그 우상을 “숭배”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것은 믿을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믿을 수 있는 대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믿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위안을 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상숭배’는 자신이 만든 종교를 믿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만든 종교를 믿으면서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받을 수 있다면 우상숭배도 크게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의 가장 큰 기능 중에 하나는 어차피 심리적인 평안과 안정을 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건강한 종교와 우상숭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숭배대상이 가지고 있는 “힘”의 원천이다. 진정한 종교의 숭배 대상은 원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대상이다. 하지만 우상은 원래 힘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만든 존재다. 따라서 우상이 힘을 가지고 내게 위안을 주려면 그 힘을 내가 만들어주어야 한다. 우상은 의지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약하게 되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우상에 빠진 사람의 말로는 비참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힘을 우상에게 투여하고 마지막에는 생애 초기의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퇴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종교와 병든 종교의 차이, 또는 건강한 신앙과 병든 신앙의 차이는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어려움을 이겨나가면서 하루하루를 희망차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의미’를 주는 종교인지의 여부와 그렇게 믿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건강한 종교를 건강하게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의 힘으로 현실을 더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계속 공급받는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