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의 무소(舞巢)는 춤 낭만파의 거두 최현이다. 최현의 춤집에서 만들어진 『군자무』는 깊고 길게 뿌리를 내려 지금에 이른다. 국립무용단 단원, 국악고 무용과 교사 시절 축적한 실기와 이론 경험을 접목한 이 작품은 국립 무용단의 향방을 가늠케 한다. 선비에 대한 집요한 성찰, 매란국죽에 대한 본래의 빛깔 강조는 비장한 자연미로 난감한 반향(反響)을 불러 온다. 분명한 주제에 대한 가공, 상상, 수사는 즐거움의 고양, 미적영역 확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전통 타악에서 시작된 춤은 거문고의 중모리에 선비의 성품을 상징하는 첼로의 묵직함을 동반한다. 선비의 도포를 상징하는 하얀 바탕에 수직의 굵은 검정선이 지필묵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선과 움직임의 이미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흑백유희는 시작된다. 볼륨을 살린 너른 도포 자락이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깊이를 보여준다. 땅의 기운을 받은 춤은 하늘의 축복을 받는 듯하다. 한글 제목이 뜨고, 매란국죽의 장(場) 나눔 표시도 한글이다.
매화(梅花): 배경막은 매화의 만개를 알리는 문양으로 치장되고, 가곡, 가사, 시조의 분위기를 총괄하는 정가, 휘몰이 시조가 흐름을 잡더니 울림으로 번진다. 여성 군무로 구성된 이 춤은 붉은 저고리에 부풀린 흰 치마의 여인, 독무로 시작된다. 느리게 전개되는 멋들어짐, 매화향이 번짐을 느끼게 한다. 진행에 따라 배가되는 매화, 여인들은 절개의 춤을 춘다. 미풍에 타고 들어 올려지는 버선 발, 잔걸음, 숨결이 느껴지는 만춘(晩春)의 결(潔)은 곱다.
난초(蘭草): 은은한 난향이 벗을 부르는 여름, 중중모리를 이루는 가야금, 머리에 쓴 양반을 상징하는 모던한 갓의 선비, 청저고리에 회색치마를 입은 여인과 청초(淸楚)를 추어 된다. 난을 상징하는 초록선 조명으로 떨어지고, 현(絃)과 춤 환상이다. 무예에 버금가는 집중, 바닥까지 연결되는 흰 바탕에 검정 줄, 절묘한 선위의 춤이다. 너른 마음의 긴 도포를 한 선비의 기개와 내조와 고혹의 난초꽃, 남성 삼인, 여성 삼인으로 조우한다. 남성 이인, 듀엣, 여성 이인 등 놀라운 좌우 균제감, 음감과 색감이 살아난다. 여름은 가볍게 물러난다.
국화(菊花): 국화를 상징하는 노란 치마에 갈색 저고리, 가을을 불러온다. 결실을 나타내는 노랑, 깊어가는 가을, 진양조의 해금이 구슬프게 운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무대는 온통 노란 국화로 뒤덮인다. 여인들은 국화 자체이며, 음미하는 객관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자세는 한국화의 주인공 여인들의 전형이 된다. 국화 문양이 개별이 아니고 모두 합쳐질 때의 절정은 노랑의 확장감으로 관객의 호흡을 멈추게 할 정도이며, 국화의 이미지화에 성공한다.
오죽(烏竹): 두 개의 대금이 자진모리로 산조를 연주하면, 긴 대나무를 든 한 선비가 나타난다. 푸르다 못해 검은 선비의 높은 기개, 철릭을 걸친 남성 무용수들 숫자를 늘여간다. 바닥에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 대나무를 집고 오르고, 비스듬히 서고, 대나무 잡고 위로 돌리기, 사선으로 집고 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