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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靈性으로'…올바른 신앙과 맹목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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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靈性으로'…올바른 신앙과 맹목적 신앙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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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기적'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다반사


종교는 眞僞 가리는 '앎'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

믿음과 불신은 제로섬 아닌 상대적 '공존관계' 인정


맹목적 신앙 강요보단 '~에도 불구하고' 가르쳐야


▲동방정교의수장인바르톨로메오스1세총대주교(왼쪽)가프란치스코교황등이참석한가운데예루살렘의성묘교회에서설교를하고있다.이미지 확대보기
▲동방정교의수장인바르톨로메오스1세총대주교(왼쪽)가프란치스코교황등이참석한가운데예루살렘의성묘교회에서설교를하고있다.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종교의 세계에는 우리의 지식과 이성(理性)으로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다반사다. 우선 종교적 신앙의 대상(對象)부터 그렇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쳤고, 예수님은 남자와의 관계 없이 성령으로 잉태한 정결한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개신교에서는 이승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유무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이승에서의 업(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輪廻)를 한다고 가르친다. 이 밖에도 거의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이적과 기적의 사건들이 종교의 세계에는 존재한다.

‘신앙’이라는 한자어는 ‘믿을 신(信)’과 ‘우러를 앙(仰)’이 결합된 단어다. 신앙이란 결국 ‘절대자나 절대적 가르침에 대해 믿고 우러르며 따르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다. 절대자의 존재 여부나 절대적 가르침의 진위(眞僞) 여부는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앎’의 영역 즉 지식의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인정하는 주관적 ‘믿음’의 영역이다. 객관적으로 진위가 검증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믿음’과 ‘불신’이 같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계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누가 더 많이 아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종교에서는 ‘누가 더 믿음이 강하냐?’의 여부가 중요하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은 특정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믿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본받아야 할 긍정적 동일시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든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자기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공유하고 공고히 하는 의식(儀式)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믿음이 좋은 사람’을 가려서 그들 나름의 합당한 보상을 하고 그들을 닮으라고 계속 교육한다.

▲미국맨해튼의작은자공동체교회에서불교와원불교,천주교,개신교성직자들과신도들이함께하는성탄축하예배를거행하고있다.이미지 확대보기
▲미국맨해튼의작은자공동체교회에서불교와원불교,천주교,개신교성직자들과신도들이함께하는성탄축하예배를거행하고있다.
종교에서는 끊임없이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계속 ‘끊임없이’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다’ 또는 ‘믿지 못 하겠다’는 것을 반증(反證)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숙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믿음’과 ‘불신’의 과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음과 불신을 같은 차원의 양극(兩極)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불신은 서로 반대이어서 한 쪽이 강하면 다른 쪽이 약해지는 것으로 여긴다. 믿음이 강하면 강할 수로 불신은 적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로 불신이 강하면 당연히 믿음이 적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따지지 말고 믿으라”고 요구하면서 불신을 마음 속에서 몰아내라고 교육한다.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완전히 믿게 될 때 신앙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런 수준의 높은 신앙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하고 수양을 하라고 가르친다.

아는 것도 많고 일상생활에서는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들도 종교의 영역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상하리만큼 비이성적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마음으로는 믿어야 하는 ‘모순(矛盾)’의 세계에서 살아야하는 고민이 만만치 않다. 오히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열심히 더 적극적으로 믿어야한 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커진다. 그래야 “믿음이 좋은 것이니까!” 그것은 마치 담배를 즐기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금연을 하게 된 후 처음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사람보다 더 열심히 담배의 해악에 대해 강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라고 부른다.

이런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신학이나 심리학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예를 들면, 20세기의 큰 신학자 중의 한 분인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종교계에서 지성(知性)을 경시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지성의 희생(sacrifice of intelligence)”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신화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표현된 종교의 가르침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해서 지성을 희생하는 것보다 오히려 지성을 이용하여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종교인의자세는무조건믿기를강요하기보다는이성적으로믿음을이해하고받아들이는태도가더중요하다.이미지 확대보기
▲종교인의자세는무조건믿기를강요하기보다는이성적으로믿음을이해하고받아들이는태도가더중요하다.
심리학자 에릭슨(Erik Erikson)은 믿음과 불신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믿음과 불신의 관계는 단일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과 불신의 관계는 한 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이 약해지는 ‘시소(seesaw)의 관계’가 아니라 ‘공존(共存)의 관계’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믿음과 불신이 동시에 강해질 수도 있고, 또 동시에 약해질 수도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신이 강하면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해질 수도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불신이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존재할 수 없고, ‘악(惡)’이 없으면 ‘선(善)’도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세상에 여자는 없고 남자만 존재한다면, 더 이상 남자는 없고 다만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선도 악이 없으면 따라서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에는 ‘선과(善果)’나 ‘악과(惡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善惡果)’가 있다. 만약 100% 불신이 없는 상태라면, 이는 완벽한 믿음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상태 즉 ‘무신앙(無信仰)’의 상태에 불과할 것이다.

믿음과 불신의 관계는 ‘제로섬(zero-sum)’의 관계가 아니라, 상대적인 ‘비율(比率)’의 관계다. 즉 믿음의 유무는 믿음의 양과 불신의 양의 크기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불신보다 믿음의 양이 더 많으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반대로 믿음보다 불신의 양이 더 많으면 ‘불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세기’는 내가 포용할 수 있는 불신의 양에 비례한다. 만약 내가 불신이 많으면서도 계속 믿음을 견지할 수 있다면, 나의 믿음은 그만큼 강한 것이 된다. 반대로 내가 포용할 수 없는 불신의 양이 적으면 그만큼 나의 믿음은 적은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불신의 양이 10점 만점에 3점이라면 나는 4점만큼의 믿음이 있어도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5점만큼의 불신을 유발하는 사건이 닥쳐온다면 나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고 결국은 믿음을 잃게 된다. 하지만 평소에 8점만큼의 불신이 있음에도 믿음을 유지한다면, 나는 최소한 9점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웬만한 사건이 닥쳐도 믿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종교계에서도 불신을 없애라고 가르치면서 ‘맹목적(盲目的)인 신앙’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밝히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믿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 불신이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맹목적인 바보가 되는 신앙인이 아니라 건강하고 지성적이고 사리분별을 잘 하는 똑똑한 ‘믿음이 좋은’ 신앙인을 양성할 수 있다.

20세기에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테레사수녀의 내밀한 신앙고백을 엮은 책 “내 빛이 되소서(Come, be my light!)”라는 책에는 테레사수녀가 50여 년간 천국과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어둠을 겪었으며, 그것을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 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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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고려대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