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삶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욱 성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종교를 통해 삶의 힘을 주는
성숙한 신앙이 도움이 된다. 미성숙한 삶은 자신을 절대화하고
다른 삶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 종교는 독(毒)이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글로벌이코노믹=한성열 고려대 교수] 우리는 보통 종교를 가진 사람이 그 종교의 영향을 받아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결국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약 그렇다면 종교를 가진 연조(年條)가 길수록 더 성숙한 인격을 가져야한다. 더 오래 종교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특정한 종교 제도 안에서 신앙의 연조가 길어야 맡을 수 있는 직책에 있는 사람이 더 성숙해야 한다. 하지만 특정 종교의 안과 밖에서 경험하는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특정 종교를 믿다가 실망하고 신앙생활을 포기한 사람들 중에는 교리에 의심과 회의(懷疑)를 느꼈다기보다 종교지도자에게 받은 심리적 상처나 인간적인 실망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종교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중대한 역설(逆說)’ 즉 ‘Grand Paradox’ 라고 부른다. 이 현상이 ‘중대한’ 이유는 특정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종교에서만 나타난다면 그 종교의 문제라고 치부하면 되겠지만,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면 이는 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중대한 것이다.
이 현상이 ‘역설’인 이유는 거의 모든 종교의 핵심적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을 가르친다. 그것이 ‘사랑’이든 ‘자비(慈悲)’이든 ‘어짐(仁)’이든 결국 “남에게 받기를 원하는 대로 먼저 남에게 베풀라”라는 황금률(黃金律)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가르침이 ‘Golden Rule(황금률)’인 이유는 물론 모든 가르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가 종교(宗敎)인 까닭은 ‘종(宗: 근본, 으뜸)’ 과 ‘교(敎: 가르침)’ 즉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중대한 역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여럿을 들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종교를 자기들의 미성숙한 인격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행동을 정당화(正當化)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부족한 존재다. 수많은 가르침들이 인간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 원인과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종교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 많은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왜 인간은 완전해지지 못하는가? 완전해지기는커녕 왜 조금 더 성숙해지는 것이 그처럼 어려운 일일까?
조금 더 성숙해지려면 먼저 자신이 미성숙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처절함에 따르는 고뇌를 감당할 의사(意思)도, 의지도 없다. 그것은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착각이 심하면 심할수록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못한다.
자아가 제일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현실적 요구를 감당한 힘과 능력이 없으므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이 상태에서는 실재적 현실과 자신이 재구성한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허구(虛構)의 비현실 속에서 생활한다. 이런 상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허구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약한 자아는 현실에서 오는 압력을 견뎌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면 극단적으로는 자신이 살아있는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게 된다.
그 다음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나’와 ‘너’를 구별하지 못하는 ‘투사(投射)’라는 심리적 기제와, 감정을 제어할 자아의 힘이 약하므로 급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화(行動化)’라는 기제를 많이 사용한다. 이 상태가 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혼동한다. 자기가 상대방을 미워하면서도 상대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느낀다(투사).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상대방을 공격했다는 ‘정당방위’의 논리를 만들어낸다(행동화).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한 전쟁 중에 가장 빈번한 원인이 종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여년에 걸쳐 진행된 십자군전쟁이래 현재의 중동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밑바닥에는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증오하고, 그 증오를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생하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정당화한다.
그 다음 미성숙한 상태가 소위 ‘양심’과 ‘욕구’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신경증적’ 단계다. 이 단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자신이 양심의 명령과 어긋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억압(抑壓)’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반대되는 행동을 함으로써(반동형성)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다. 마치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억압한 감정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종교적인 이유로 정당화한다. 이들에게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것은 지극히 양심적인 행동이 된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자신이 양심에 어긋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미워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객관적이라기보다 많은 면에서 자신이 주관적으로 구성한 허구의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성숙한 삶이라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삶’이다. 종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바로 우리 모두가 부족한 존재라는 것이다. 서로 잘 났다고 경쟁하는 것이 사실 절대적 기준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더 성숙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족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더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용서할 수 있다. 동시에 더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수양(修養)의 생활을 하게 된다.
종교는 이런 노력에 힘을 실어주는 힘을 제공해줄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본성은 “사랑”이고 부처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분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성숙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다. 동시에 그들은 ‘성숙한 삶’이 어떤 것이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신 ‘역할모델’이다.
비록 우리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는 못할지라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주는 분이다. 신앙 그 자체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앙에는 성숙한 신앙과 미성숙한 신앙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성격의 미숙함과 성숙함에 달려있다. 성숙한 삶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욱 성숙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종교를 통해 삶의 목적과 힘을 주는 성숙한 신앙이 도움이 된다. 하지만 미성숙한 삶은 자신을 절대화하고 자신과 다른 삶을 인정하지 못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 종교는 오히려 독(毒)이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